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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마케터 2023. 12. 19.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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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틴어: Gaius Julius Caesar: 기원전 100년 7월 12일 ~ 기원전 44년 3월 15일) 또는 줄리어스 시저는 로마 공화국의 정치가, 장군, 작가이다.

기원전 60년대 말에서 5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는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소위 제1차 삼두 정치라는 초법적 정치 연대를 이루어 수년간 로마 정계를 장악하였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기원전 58년 ~ 52년)하여 로마 제국의 영토를 북해까지 넓혔으며, 기원전 55년에는 로마인 처음으로 브리타니아 침공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공훈 덕분에 카이사르는 강력한 세력가로 입지를 굳혀 폼페이우스를 위협하게 되었으며, 카라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전사하면서 삼두정의 두 정치가 사이에 긴장이 높아졌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단으로 하여금 루비콘 강을 건너게 하는 결단을 내려 기원전 49년에 내전이 일어났으며, 파르살루스 전투, 탑수스 전투 등에서 승리한 카이사르는 로마 세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등극하였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에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일군의 원로원 의원들이 공화정을 복고하고자 음모를 꾸며 카이사르를 암살하였다.

그러나 또 다시 내전이 일어났으며, 결국 카이사르의 양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영속적인 전제정을 성립하였다.

카이사르가 죽은 지 기원전 42년에,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공식적으로 로마의 신으로 축성하였다.

따라서 그의 사후 그의 공식명칭은 신격 카이사르가 되었다(Divus Caesar).

카이사르의 삶은 본인이 쓴 전쟁 기록(갈리아 전기, 내란기)을 통해 상당 부분 알려져 있으며, 정적임과 동시에 오랜 친구였던 키케로와의 서신과 그의 연설, 살루스티우스의 기록, 카툴루스의 시 등 당대의 다른 사료도 남아 있다.

카이사르는 귀족인 율리우스 씨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대 플리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조상 가운데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난 사람이 있어서 ‘자궁에서 잘라온(ab utero caeso)’이란 뜻으로 카이사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주장했다.

카이사르는 코끼리를 새긴 동전을 주조하였는데, 그가 자신의 이름에 대한 해석 가운데 코끼리와 관련된 해석을 좋아했다는 점을 암시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은 유서깊은 계보를 지녔으나, 정치적으로 별다른 영향력이 없었으며, 가문에서 배출한 집정관 수도 세 명에 불과하였다.

카이사르의 아버지인 동명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공화정에서 두 번째로 높은 법무관직까지 올랐으며, 아시아 속주 총독을 지냈는데, 아마도 매형이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영향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또 카이사르의 가정 교사는 갈리아 출신의 웅변가이자 문법가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그니포였다.

카이사르는 누이가 둘 있었는데 모두 이름이 율리아였다.

기원전 91년에서 88년 사이에 로마와 이탈리아 동맹국들이 로마 시민권 문제를 놓고 동맹국 전쟁을 벌였으며, 그러는 사이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는 로마의 동부 속주를 위협하였다.

이후 폭동이 일어났고 로마에서 탈출한 술라는 로마로 진군하여 자신의 지휘권을 주장하며 술피키우스를 처형하고 마리우스파를 축출하였으나, 술라가 원정을 떠난 사이에 마리우스가 임시로 모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기원전 86년 초에 마리우스가 세상을 떠났으나, 킨나를 중심으로 한 그의 지지자들이 계속 정권을 잡았다.기원전 85년 어느날 아침에 카이사르의 아버지가 신발을 신는 중에 별다른 이유도 없이 갑자기 죽자 카이사르는 16살의 나이에 가장이 되었다.

이 사제직에 오르는 사람은 귀족일 뿐 아니라 귀족과 결혼한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는 기사 출신 가문의 평민 여자인 코수티아(Cossutia)와 어릴 때 맺은 약혼을 파기하고, 당시 민중파의 영수였던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하였다.이때 미트라다테스와 협정을 맺었던 술라가 돌아와 마리우스 지지자들에 대항한 내전을 종결하였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작전을 수행한 뒤 그는 기원전 82년 11월 1일에 콜리나 대문의 전투로 로마를 장악하였다.

도주했던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오는 대신 군 입대를 택하여, 아시아 속주에서는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 휘하에서, 킬리키아에서는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밑에서 복무하였다.

역설적으로 카이사르가 군 경력을 쌓을 수 있었던 연유는 사제직을 잃은 덕분이었는데, 플라멘 디알리스 사제는 말을 만지거나 자신의 침대가 아닌 곳에서 사흘 밤을 자거나 로마 바깥에서 하룻밤을 자거나 군대를 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튀니아 임금 니코메데스 4세의 함대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던 중 카이사르는 궁정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어 왕과 동성애 염문이 돌았으며, 이후에도 이 소문은 계속 그를 따라다녔다.기원전 80년, 독재관에 오른 지 2년 만에 술라는 사임하고, 다시 집정관제를 복원하였으며, 집정관에 재직한 뒤 정계에서 은퇴하여 사인(私人)으로 물러났다.

나중에 카이사르는 술라가 독재관직을 포기한 일을 두고 "술라는 정치의 가나다도 모른다"고 비웃었다.

2년 뒤인 기원전 78년에 술라는 세상을 떠났으며, 국장이 열렸다.

술라의 사망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로마에 돌아와도 안전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가 로마로 돌아올 때 반술라파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반란을 시도하였으나, 레피두스의 지도력을 신뢰하지 않은 카이사르는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수사학을 완성하기 위해 기원전 75년에 그는 로도스섬으로 유학하여 일전에 키케로를 가르친 바 있는 아폴로니우스 몰론 밑에서 공부하였다.에게해를 지나던 중, 카이사르는 킬리키아 해적에 잡혀, 도데카니사 제도의 파르마쿠사 섬에 갇히게 되었다.

몸값이 지불되자 카이사르는 배를 모아 해적들을 추적해 잡았으며, 이들을 페르가몬에 투옥시켰다.

아시아 총독 마르쿠스 융크투스는 카이사르의 요구대로 이들을 처형하길 거부하고 해적들을 노예로 팔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해안으로 돌아가 자신의 권리에 따라 이들을 십자가형에 처하였다.

이 시기에 스파르타쿠스 전쟁이 일어났는데(기원전 73~71년), 카이사르가 이때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이에 관여했다.

기원전 69년 봄 혹은 초여름에 장례가 끝나고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의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휘하에서 재무관직을 수행하였다.

기원전 67년에 돌아와서, 그는 술라의 손녀인 폼페이아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두 차례 반란 모의에 연루된 혐의를 받기도 하였다.

기원전 63년은 카이사르에게 파란 많은 해였다.

그는 호민관 티투스 라비에누스를 설득하여 벌족파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라비리우스에게 37년 전에 원로원 비상 결의로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하고 자신을 이 사건을 심리할 두 재판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임명하게 하였다.

라비에누스는 다음 회기에 기소를 재청할 수 있었으나, 카이사르의 지시로 재청하지 않아 이 문제는 중지될 수 있었다.

카이사르의 목적은 라비리우스 개인이 아니라, 집정관들이 민회에 대한 상소권도 무시한 채 이른바 국가의 적들을 처형할 때 휘둘러온 원로원 비상 결의의 정당성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라비에누스는 이후 십 년간 카이사르의 중요한 친구가 되었다.

술라가 임명했던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가 그 해에 죽자 카이사르는 로마 국가 종교의 수장인 대신관직 선거에 출마하였다.

선거일 아침에 카이사르는 어머니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면 대신관에 당선되어 있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선거 운동으로 막대한 빚을 져서 추방되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대신관은 신성로(Via Sacra)에 관저가 있었다.그 해 집정관이었던 키케로는 공화국을 장악하려는 카틸리나의 음모를 알렸으며, 카툴루스 등은 카이사르가 이 음모와 연관이 있다고 고발하였다.

다음 해 법무관으로 선출되었던 카이사르는 이 음모 연루 문제 처리를 놓고 벌어진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였다.

회의 중에 카이사르는 쪽지를 받았다.

그러자 카이사르의 정적인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는 카이사르가 음모자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며 그 쪽지를 크게 읽도록 요구하였다.

반역 음모자를 사형에 처하자는 의견에 대해 카이사르는 설득력 있게 반박하면서 종신 징역에 처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카토의 연설로 결국 음모자들은 처형되었다.

다음 해 이 반란 음모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카이사르는 다시 공범 혐의로 고발되었다.

그러나 키케로는 카이사르가 이 음모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스스로 보고한 적이 있다고 증언하여 문제가 풀렸으며, 고발자 가운데 한 사람과 또 위원회 위원 한 사람이 구금되었다.기원전 62년에 법무관이었던 카이사르는 당시 호민관이었던 메텔루스 켈레르가 논쟁적인 입법 제안에 지지하였으며, 두 사람은 매우 완고하여 원로원에서 이들을 직무 정지에 처하였다.

카이사르는 계속 법무관직을 수행하고자 하였는데, 폭력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가 자신을 지지하는 대중 시위를 진정시키자 원로원은 그를 복직시키기로 하였다.그 해에 보나 데아(Bona Dea, "선한 여신") 제사가 카이사르의 관저에서 열렸다.

재판에서 카이사르는 로마의 유력 가문인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거스르지 않고자 클로디우스에게 불리한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으며, 클로디우스는 막대한 뇌물과 협박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내 아내는 어떤 의심도 받아서는 안 된다"면서 폼페이아와 이혼하였다.법무관직을 수행한 뒤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이베리아 바깥) 속주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아직도 상당한 빚을 지고 있던 터라 로마를 떠나기 전에 빚쟁이들을 설득해야 하였다.

폼페이우스에 반대하는 자신을 지지하는 대가로 크라수스는 카이사르의 빚 일부를 지불하고, 나머지 빚에는 보증을 서 주었다.

그렇게 하고도 카이사르의 법무관 임기가 끝나 일반 시민 지위가 되면 빚 때무에 기소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속주로 떠났다.

히스파니아에서 그는 칼라이키족과 루시타니족을 정복하여 그의 군대에게서 임페라토르(최고 군사령관)로 환호받았으며, 채무 관련 법을 개혁하고, 매우 존경을 받으며 총독직을 마쳤다.'임페라토르'로 경례를 받으면서 카이사르는 개선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두가지 사이에서 카이사르는 집정관직을 선택하였다.

집정관 선거에 카이사르,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몇 년 전에 카이사르와 함께 조영관직을 맡은 바 있다), 루키우스 루케이우스 세 후보가 출마하였다.

카이사르와 비불루스는 기원전 59년에 임직하는 집정관으로 당선되었다.카이사르는 이미 크라수스에게 정치적인 빚을 지고 있긴 하였으나, 폼페이우스에게도 손을 내밀었는데, 그는 자신의 퇴역병에게 준 동방의 정착지와 농지를 원로원에서 비준받기 위해 싸우고 있었으나 성과를 얻지 못한 상황이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기원전 70년에 함께 집정관직을 역임한 이래 적대 관계였으며, 카이사르는 만약 자신이 한쪽과 손을 잡으면 다른 한쪽의 지지를 잃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을 화해하고자 하였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세 사람은 충분한 자금과 더불어 공공 사업을 장악할 정치적 영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의 비공식적 정치 제휴를 제1차 삼두 정치라고 하는데, 카이사르의 딸인 율리아와 폼페이우스가 결혼하면서 공고해졌다.

임차 농지 재분배는 20명의 상설위원으로 구성하고 법안 제출자는 그 위원회에 참여하지 않는다.카이사르는 그라쿠스 형제와는 달리 기존체제에서 개혁을 실시하려 했기 때문에 보수파를 회유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보수파의 강한 반대를 받았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삼두의 강력한 힘을 이용했다.

그러나 피소와 폼페이우스의 도움으로 나중에 이 조치는 취소되고 삼두 정치가 입법시킨 '바티니우스 법'에 따라 카이사르는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이탈리아 북부)와 일리리쿰(발칸 반도 서부)의 총독으로 임명하였으며, 나중에는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도 맡겼고 그에게 4개 군단을 주었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이집트에서 쫓겨난 상태였으므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부하인 가비니우스를 파견하여 그를 왕위에 복귀시켰다.

집정관 임기가 끝나자 카이사르는 변칙적으로 정한 직무 때문에 기소되는 것을 가까스로 피하고 서둘러 임지로 떠났다.

카이사르는 여전히 많은 빚을 지고 있었는데, 속주 총독은 착취 나 위험한 군사 원정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휘하에 4개 군단이 있었으며, 임지 중 두 곳 일리리쿰과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는 북방의 미정복지와 접경하고 있는데, 이곳의 독자적인 갈리아인들은 불안정한 상태로 알려져 있었다.

로마의 동맹인 갈리아의 하이두이족(Haedui)은 전에 하이두이의 땅을 정복하고 정착한 아리오비스투스가 이끄는 게르마니아의 수에비족(Suebi) 분견대의 도움을 받은 다른 갈리아 부족에게 패하였으며, 헬베티족이 이주를 위해 대규모로 이동하면서 로마인들이 우려하던 상황이었다.

카이사르는 새로이 두 군단을 조직하고, 프로빈키아 통과를 요청한 헬베티족의 요구를 거절했다.

카이사르는 손 강에서 헬베티족을 기습공격했고 큰 손실을 입은 헬베티족은 디비코라는 강화사절을 보냈으나 그는 카이사르가 요구한 인질제공을 거부하여 회담은 결렬되었다.

카이사르는 헬베티족에게 헬베티아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고 이것이 이루어지자 승자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

그때 로마군에서 게르만인에 대한 공포가 퍼졌으나 카이사르는 몸소 연설로 로마군의 전투 의지를 되찾게 했다.

카이사르는 제10군단을 이끌고 아리오비스투스와 브장송에서 직접 만나 회담을 했고 그 협상은 게르만인들의 도발행위로 인해 결렬되었다.

이후 카이사르는 사절을 보냈으나 그들이 아리오비스투스에게 사로잡히자 그와 전투를 벌였다.

카이사르는 게르만족을 더 과감하게 공격했고 아리오비스투스는 어쩔수없이 로마군과의 회전을 준비했다.

카이사르가 아끼는 부하이자 크라수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전투에 동원되지 않는 제3열 군사를 이끌고 좌익을 지원했다.

게르만인들의 배후에 강이 있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게르만족이 죽거나 아리오비스투스를 비롯한 소수의 요인들만이 전장을 탈출할 수 있었다.

이 해의 모든 전투를 끝내고 겨울에는 세콰니족 영토로 군대를 물렸는데 이는 즉 카이사르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바깥 영토에 관심을 둔 것이 일시적이지 않다는 뜻이었다.겨울 동안 갈리아 키살피나에서 신규로 2개 군단을 또 편성하여, 임기 2년째에 카이사르는 처음보다 배가된 군사력을 갖추었다.

작년 카이사르의 군사 활동에 대응하여 갈리아 북동부의 벨가이 부족들이 무장을 시작하였다.

카이사르는 이를 공격적인 행동으로 받아들였으며, 이와중에 레미족은 반군들을 배신하고 카이사르와 동맹을 맺었다.

로마군 진영은 강을 끼고 두편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벨가이인의 공격을 받는 쪽은 카이사르가 직접 지휘했고 강 건너편의 지휘는 사비누스가 맡았다.

벨가이군은 강을 건너 사비누스를 공격하려 했지만 카이사르는 진지 안에 있던 다리를 건너 강 건너편에서 접근해오는 적과 싸웠다.

카이사르는 적군 연합부대를 크게 격파하자 차차 각 부족을 하나씩 정복하였다.

카이사르가 그들의 영토에 도착하자 기습공격을 하여 로마군의 허를 찔렀다.

로마 기병대는 이미 격파되었고 카이사르도 한번에 여러 조치를 취해야 했지만 로마군은 카이사르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빠르게 전투를 시작했다.

카이사르는 중앙의 병사들 간의 대열이 좁아 전투에 방해가 됨을 알아차리고 대열을 넓힐 것을 명령했다.

결국 로마군의 승리로 끝난 이 전투로 네르비족의 전투력은 궤멸되었고 카이사르는 이들에게 볼모제공을 요구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그들에게 무기를 버릴 것을 요구했고 아투아투카의 전체 무기 중 삼분의 일 가량만 버려졌다.

그러는 사이 크라수스의 아들 푸블리우스가 지휘하는 1개 군단이 아르모리카 반도(Armorica)의 부족들을 정복하는 작전을 개시하였다.기원전 56년 봄에 삼두 정치 인사들은 갈리아 키살피나의 루카에서 회합을 열어 만났다.

회의에서 삼두 정치를 갱신하고, 카이사르의 전임 집정관(총독) 임기를 5년 더 늘렸다.

아르모리카 정복은 카이사르의 부하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베네티족을 해전에서 무찔르면서 완수하였으며, 젊은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갈리아 남서부의 아퀴타니족을 정복하였다.

기원전 56년에 군사 작전을 종결하면서, 해안 저지의 모리니족(Morini)과 메나피이족(Menapii)만 저항하였다.기원전 55년 카이사르는 게르마니아의 최강의 부족 수에비족에게 밀려 갈리아를 침략한 게르마니아의 우시페테스족(Usipetes)과 텡크테리족(Tencteri) 문제를 교섭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카이사르는 이들에게 우비족(카이사르와 동맹을 맺은 게르만 부족)의 영토를 제공할 것이니 갈리아를 떠나라고 요구했다.

두 게르만 부족은 그 제안을 고려할 것이니 사흘간의 여유를 줄것을 간청했고, 카이사르는 이것이 게르만인의 기병대가 아직 갈리아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려는 수작이라고 생각했다.

카이사르는 물을 보급해야 한다면서 군대를 조금만 전진시키겠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대로 카이사르는 로마군 기병대를 전진시켜 그들에게 게르만인들의 정확한 의도를 알아오게 했다.

게다가 이 희생자 중에 피소라는 이름의 카이사르의 갈리아인 친구가 있었다.

교섭이 깨졌다고 판단한 카이사르는 게르만인들을 공격했고, 병력이 43만명이나 되는 두 부족은 전의를 잃고 대부분이 죽거나 일부가 게르마니아로 달아났다.

카이사르는 이들을 추격하여 라인강에 가교를 건설하고, 게르마니아 영토에 진입하여 무력 시위를 하였으며 돌아올 때 다리를 해체하였다.

이 전투가 로마에 전해지자 카토는 카이사르가 강화교섭이 진행되는 상태에서 게르만인을 기습한 것은 부당한 처사이고 따라서 카이사르를 게르만족에게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만 브리타니아인들을 다시 격파하고 강화를 맺은 다음, 인질을 요구하여 이들을 갈리아로 보내겠다고 하여 브리타니아를 떠나는 명분을 명확히 했다.이듬해 그는 더욱 준비하고 더 많은 군대를 이끌고 브리타니아에 돌아왔으며 더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카시벨라우누스는 부족간의 전투에서 명성을 얻은 자로 카이사르의 로마군이 생각보다 강한 것을 알자 게릴라전을 벌였다.

카이사르는 통상적인 것과 다르게 기병을 먼저 보내지 않고 보병과 같이 진격시키게 하여 브리타니아인의 기습공격을 막아내고 곧 반격해 그들을 격파했다.

그러나 갈리아에서 에부로네스족(Eburones)의 암비오릭스가 이끄는 반란이 퍼져 작황이 나빠지자 카이사르는 겨울 동안 군사 작전에 나서야 했으며, 전쟁은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당시 로마군의 군량이 부족해져 카이사르는 군대를 분할하여 갈리아의 여러 지방으로 분산시켰다.

에부로네스족장 암비오릭스는 로마군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자 사비누스와 코타에게 로마군을 공격한 것은 본의가 아니었고 지금 갈리아 각지에서 크게 반란이 일어났으며 자신들이 로마군을 호위할테니 진영지를 떠나고 카이사르와 합류할 것을 제안했다.

당시 병이 든 키케로는 적의 십분의 일 밖에 미치지 못하는 병력으로 분전했고 키케로의 구원요청을 받은 카이사르는 7천명의 군대를 급조하여 키케로의 진영지에 도착한 뒤, 적군을 유인하여 격파했다.

그리고 반란음모를 꾸민 카르누테스(Carnutes) 족장 아코를 사형시켰다.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에 있을 때,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딸 율리아가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카이사르는 조카의 딸인 옥타비아를 남편 가이우스 마르켈루스와 이혼시키고 폼페이우스와 결혼시켜 그의 지지를 확보하려 하였으나, 폼페이우스는 거절하였다.

기원전 53년 크라수스는 파르티아를 침공하다 카라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폼페이우스는 비상 수단으로 1인 집정관에 임명되었으며, 카이사르의 정적인 퀸투스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하고, 장인 메텔루스 스키피오를 동료 집정관으로 삼아 일단 질서를 회복하였다.

기원전 52년, 족장을 잃은 카르누테스족은 본거지인 케나붐에서 로마 민간인을 학살했는데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갈리아 중부 아르베르니족(Arverni)의 베르킨게토릭스가 일으킨 반란이 또 한번 크게 번졌다.

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 부족들을 통합하고자 하였으며, 초토화 작전으로 로마군을 무너뜨리려 하였다.

북이탈리아의 카이사르가 중부 갈리아에 있는 그의 군단과 합류하였고, 비투리게스족의 수도인 아바리쿰이 카이사르에게 점령되었지만 반로마군의 총사령관 베르킨게토릭스의 입지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아르베르니족의 수도인 게르고비아로 향했고 이즈음에 로마의 동맹부족이었던 하이두이족이 베르킨게토릭스에게 돌아섰다.

카이사르는 아르베르니족의 근거지인 게르고비아를 공격했으나 별 소득이 없었고 게르고비아를 한 차례 습격하고 철수하려 했다.

게르고비아 공략이 실패하자 카이사르는 퇴각했고 베르킨게토릭스는 추격하여 한 차례 회전이 벌어졌다.

갈리아 기병이 세 갈래로 나뉘어 공격했으나 카이사르는 방진을 이루어 이들을 모조리 격파했다.

카이사르는 이를 알고 즉시 알레시아를 포위하였다.

이들은 알레시아를 포위한 카이사르의 군대를 다시 포위하였다.

반면 카이사르의 로마군은 12개 군단 5만명이었다.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이중포위전 알레시아 전투가 기원전 52년 9월 20일에 시작되었다.

전투는 기병전으로 시작되었고, 카이사르의 게르만 기병의 활약에 갈리아 기병은 퇴각했다.

베르킨게토릭스의 사촌 베르카시벨라우누스가 이끄는 6만명의 갈리아 정예병이 다 완성되지 않은 로마군의 북쪽 포위망을 공격해왔지만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를 보내 이들을 막게하면서 포위망 여기저기에 지원군을 보냈다.

북부에서 적이 강하게 공격해오자 카이사르는 신속하게 북부 전선에 도착했다.

카이사르와 베르카시벨라우누스는 치열하게 싸웠고 카이사르는 기병대를 갈리아군 배후로 보내 그들을 격파하였다.

전임 법무관 지위의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 전쟁 동안 가장 고참인 군단장이었다.

그 밖에 두각을 드러낸 카이사르의 다른 부관으로는 친척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크라수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형제인 마르쿠스, 키케로의 동생인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 데키무스 브루투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가 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헬베티인 368,000명이 고향을 떠났으며, 이 가운데 92,000명이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는데, 군 작전 이후 총 110,000명만이 돌아왔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일단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카이사르의 보고는 선전의 목적을 띄고 있었으며, 고대 문헌에서는 보통 숫자를 과장해서 쓰기 때문에 적 전투원의 총 수효는 특히 너무 많은 것으로 보인다.

델브뤽(Delbrück)은 전체 주민 수가 100,000 이하일 것이며, 그 가운데 전투원은 16,000명에 불과할 것으로 보았는데, 이렇게 보면 켈트인 군대의 병력은 당시 30,000명 정도였던 로마군의 절반 수준이 된다.갈리아 전쟁은 서유럽에 로마문화를 전파하는데 막강한 영향을 주었다.

전쟁이 끝나고 카이사르는 정복한 전 지역을 "갈리아 코마타(Gallia comata)"라는 하나의 속주로 두었다.

결국 갈리아 일대는 카이사르의 세력기반이 되어 그가 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게 일조했다.

기원전 50년, 폼페이우스가 주도하는 원로원에서는 카이사르에게 전임 집정관 임기가 만료되었으므로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귀환하도록 명령하였다.

또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두 번째로 출마하려는 집정관 선거에 부재중 입후보를 금지하였다.

카이사르는 집정관의 면책권이 없거나 군사력이 없는 상태로 로마에 들어간다면 기소되고 정계에서 밀려나리라고 생각하였다.

기원전 49년 1월 7일, 집정관 가이우스 마르켈루스는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시켰고, 그 전권을 위임받은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불복종과 대역죄 혐의로 고발하였다.

기원전 49년 1월 12일, 카이사르는 단 1개 군단만 이끌고 루비콘 강(이탈리아의 북방 경계선)을 넘어 내전의 도화선에 불을 당겼다.

수에토니우스는 이 문장을 라틴어로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라고 썼다.기원전 49년 1월 12일 카이사르는 휘하의 10개 대대 45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루비콘 강을 건넌 후, 제일 먼저 아리미눔에 입성하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는 5개 대대를 떼어줘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아레티움을 공격하고 쿠리오에게는 3개 대대를 주어 아드리아 해를 따라 피사우룸, 파눔, 안코나를 공격하게 했다.1월 12일 쿠리오는 피사우룸, 1월 13일 파눔, 1월 14일에는 안코나까지 함락시키고 1월 15일 안토니우스도 아레티움에 입성했다.

이에 원로원에서는 현직 법무관 로시우스와 카이사르의 친척 동생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원로원 최종 권고를 전했고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후임자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임명해 2개 군단이 주둔한 카푸아로 떠났다.

카이사르는 로시우스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통해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양자 회담을 벌이고 동시에 군단 해산을 제안하는 내용의 서한을 폼페이우스에게 보냈다.그리고 1월 17일 폼페이우스는 수도 로마를 버린 채 200명에 달하는 상당 수의 원로원 의원들과 각종 개인 재산과 장인 메텔루스 스키피오, 카토 등과 함께 노예, 하인들을 데리고 남하했으나 국고에 들어 있는 재산은 채 옮기지 못하고 도주했다.

카이사르는 이때 폼페이우스의 답장을 받았으나 그가 제안한 양자 회담을 묵살시키고 자신에게만 군단해산을 요구한다는 이유로 폼페이우스의 제안을 거절했다.

게다가 그는 폼페이우스가 히스파니아로 떠나는 시기를 밝히지 않는 것은 그가 계속 본국에 군사력을 가지고 머무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한편 폼페이우스 진영에서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지낸 푸블리우스 아티우스 바루스와 폼페이우스 휘하에서 백인대장을 지내고 오리엔트 원정에도 참전한 루키우스 푸피우스가 아욱시뭄에서 군사를 이끌었으나 주민들의 호응에 실패하고 카이사르는 아욱시뭄 근처 킹쿨룸에서 보급을 해 2월 3일 아욱시뭄에 입성했다.2월 5일 카이사르는 피르뭄에 입성하고 제12군단도 참여했으며 아스쿨라네움으로 행군했다.

이에 기원전 57년의 집정관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가 10개 대대를 이끌고 지키고 있었으나 카이사르가 오자 도망쳐버려 2월 15일 아스쿨라네움도 쉽게 함락되었다.그러자 폼페이우스가 급파한 비불리우스 루푸스가 13개 대대가 되는 병력을 모아 코르피니움에 주둔했고 곧이어 아헤노바르부스가 20개 대대를 이끌고 행군해 3.3개 군단에 달하는 33개 대대가 모일 예정이었다.

이에 루푸스는 폼페이우스가 있는 루케리아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폼페이우스는 오히려 더 남쪽인 카노사로 남하하는 문제를 고려하고 있었다그러는 사이 카이사르는 코르피니움 근처의 술모나 주민들의 호응도 얻고 남프랑스 속주에서 갈리아인으로 구성된 22개 대대도 합류해 결국 병사들을 버리고 도망치려던 아헤노바르부스는 붙잡혔다가 카이사르의 배려로 석방되고 2월 21일 카이사르는 코르피니움에도 입성했다.

카이사르의 행동에 대해 키케로는 "아군을 버리는 폼페이우스와 적을 용서하는 카이사르는 얼마나 다른가" 라며 카이사르에게도 편지를 보내 카이사르의 관용을 칭찬했다.

카이사르는 답변했다.

그리고 브룬디시움으로 도망치는 폼페이우스를 추격했다.결국 폼페이우스는 일행을 이끌고 2월 25일 항구 도시인 브린디시움에 도착했다.

카이사르가 브룬디시움에 도착했을 때, 폼페이우스에게 양자 회담을 통한 강화를 제안했지만 폼페이우스는 지금까지 자신을 따라온 이들을 배신하는 짓을 벌일 수 없다며 강화를 거부했다.

6개 군단 60개 대대로 불어난 카이사르 군단이 오는 가운데 잦은 탈영으로 50개 대대로 줄어든 폼페이우스는 3월 17일 카이사르의 저지선을 뚫고 그리스로 본국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이로써 카이사르는 이탈리아를 무혈제패했지만 폼페이우스를 놓쳐 내전은 장기화되었다.폼페이우스가 군대를 철수시키려고 해안의 모든 배를 이미 쓸어가버린 터라 카이사르는 해군력이 없었고, 폼페이우스의 7개 군단이 주둔한 이베리아 반도는 평정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히스파니아로 진로를 돌리기로 하였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를 로마의 장관으로 남겨놓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호민관으로 이탈리아 나머지 지역을 맡겨놓고, 카이사르는 파비우스의 3개 군단과 합류하여 히스피니아로 진격했다.

이런 상태로 한달을 버틴 카이사르는 운하를 파서 물길을 바꾸어 고립에서 벗어났고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가 이끄는 9만명의 폼페이우스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식량부족에 빠트리게 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군의 도주는 카이사르에게 계속 저지되었으며 그들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그러자 페트레이우스는 화해를 거부하며 병사들의 전의를 다시 일깨웠고, 폼페이우스군 진영에 들어온 카이사르의 병사들을 죽이라고 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식량부족으로 카이사르에게 항복하였다.

카이사르는 아프라니우스 휘하 병사들의 군대해산을 명하고 모두 석방시켰다.

히스파니아 전쟁이 끝나고 카이사르는 법무관 레피두스를 시켜 독재관에 취임했다.

독재관에 취임한 그는 술라가 반역자로 규정하여 살생부에 올라 망명생활을 하는 자들에 대한 추방형을 폐지했다.카이사르가 히스파니아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카이사르 함대가 아헤노바르부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 - 마실리아 연합함대를 격파하였고 폼페이우스의 편을 든 마실리아는 결국 카이사르군에 항복하였다.

카이사르의 부장 쿠리오가 이끄는 4개 군단은 시칠리아 점령을 완수한 뒤 아프리카에서 아티우스 바루스가 지휘하는 군대를 공격했다.

그러나 누미디아왕 유바를 우습게 본 쿠리오는 유바가 렙티스 사람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회군하였고, 유바왕의 부하 사부라가 소수의 군대를 지휘한다는 거짓 정보에 속아 바그라다스 강 전투에서 4개 군단과 함께 포위당하고 말았다.

"카이사르의 군대를 잃고 카이사르에게 돌아갈 수 없소" 이 말을 외치고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했다.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와 돌라벨라는 카이사르의 명령으로 아드리아 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려 갈리아 군단을 이끌고 폼페이우스군과 맞섰으나 노련한 폼페이우스의 해군장수 리보에게 패하고 이탈리아로 도망쳤다.

이후 카이사르는 스스로 집정관 선거를 열어 두 번째로 집정관에 올랐으며(동료 집정관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였다), 그런 다음 11일 뒤 독재관직에서 사임하였다.기원전 48년 1월 4일에 그리스에 있는 폼페이우스를 상대하고자 동방으로 향했는데, 배가 부족했기 때문에 카이사르가 직접 이끄는 제1진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제2진으로 나누어 아드리아 해를 건너기로 했다.

폼페이우스 해군 총사령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는 카이사르군 제1진의 무사통과에 격분하여 해안경비체제를 강화했다.

이때 카이사르는 압수스 강에서 폼페이우스의 지상군과 대치했으나 수적으로 매우 불리했기 때문에 전투를 치르지 않았다.

수뇌진과의 타협이 실패하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병사들과 타협해 볼 생각으로 휘하 장수인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를 보냈다.

카이사르는 비불루스와 만나 회담을 벌이려 했으나 카이사르를 매우 싫어하는 비불루스는 카이사르를 만나기를 거절하고 리보가 카이사르와 회담을 벌였다.

카이사르는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에게 2개 군단과 500기를 주고 마케도니아로 보냈고, 카시우스 롱기누스에게 1개 군단과 200기를 주어 테살리아로, 사비누스에게도 5개 대대와 약간의 기병을 주어 아이톨리아로 보냈다.

그런다음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본진인 디라키움과 페트라를 포위했다.

이렇게 몇 달간 대치한 뒤에 폼페이우스군은 말먹이가 부족해지자 카이사르의 포위망을 공격하였다.

당시 카이사르는 디라키움으로 떠나 카이사르의 진영에는 총사령관이 없는 상태였다.

원래 카이사르가 직접 포위망 북부를, 안토니우스가 남쪽 포위망을 맡았는데 사령관이 없는 북부전선을 루키우스 술라의 조카이지만 카이사르파인 푸블리우스 술라가 지휘했다.

특히 카이사르의 백인대장 스카이바는 200명으로 폼페이우스군 25000명의 공격을 4시간이나 버텨냈으며 스카이바 자신의 방패에는 화살구멍이 120개나 뚫려있었다.

결국 푸블리우스 술라의 구원을 받아 폼페이우스군을 격퇴했으나 술라는 그들을 추격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술라가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비난했으나 술라는 총사령관이 없는 이상 그가 지시하지 않은 것을 행할 수 없다고 말했다.카이사르 진영에 로우킬루스와 에구스라는 갈리아 트란살피나의 알로브로게스족 귀족 출신 기병 장교가 있었는데, 그들은 휘하 기병들의 급료와 전리품을 강탈하여 부하들의 원망을 샀다.

결국 기병들이 카이사르에게 이들의 부정을 고발하자 카이사르는 형제를 불러 그들을 나무랐다.

기원전 48년 7월 10일 폼페이우스는 이들로부터 카이사르군의 정보를 듣고 방어설비가 약한 카이사르의 포위망 남쪽을 공격했다.

이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진영을 공격함으로써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카이사르군이 폼페이우스군이 만든 측벽을 방벽으로 착각하여 그것을 공격하였고 이로 인해 폼페이우스가 구원병력을 데려올 수 있게 시간을 제공하게 되었다.

전투 후,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군 포로를 조롱하고 모조리 죽였다.디라키움 공방전에서 폼페이우스가 승리하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본거지인 디라키움 일대에서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그리스 동부에 위치한 테살리아로 유인하면서 7월 24일 도미티우스와 합류했다.

카이사르는 메텔루스 스키피오에게 다시 강화를 제안했지만, 스키피오는 망설이다가 파보니우스의 혹독한 비난을 받고 제안을 거절했다.

아헤노바르부스와 렌툴루스 스핀테르와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카이사르가 취임하고 있던 최고 제사장에 자신이 더 적임자라고 논쟁을 벌였다.

카이사르는 고지대에 있던 폼페이우스를 평원으로 이끌고 결전 준비를 했다.

이때 카이사르는 병사들에게 연설했다.

본인은 아군기병에게 양쪽 군대의 간격이 좁아지면 카이사르군의 우익으로 돌아 노출된 측면을 공격하고 후방의 제 3열을 포위하여 카이사르 군대를 혼란에 빠뜨리라고 명령하였소.

폼페이우스의 속셈을 간파한 카이사르는 고참 군단병 2000명으로 제4열 별동대를 편성하여 카이사르군 우익 뒷편에 포진시켰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카이사르의 제10군단 수석 백인대장 크라스티누스는 비장한 연설을 하였다.

기원전 48년 8월 9일 파르살루스 전투는 카이사르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카이사르군의 갈리아 전쟁 7년의 오랜 전투 경험이 그들이 폼페이우스의 작전에 넘어가지 않게 해주었다.

곧 폼페이우스는 기병에게 출동명령을 내렸고 수적에서 열세인 카이사르 기병은 못 당해내는 것처럼 후퇴했다.

폼페이우스 기병이 카이사르군 배후로 돌아가는 순간 카이사르는 제4열 창병 부대를 출격시켰다.

카이사르의 창병 부대는 정면에서 폼페이우스 기병대를 막아섰고 후퇴했던 카이사르 기병도 적군 기병의 배후를 포위했다.

폼페이우스 기병은 곧 격파되었고 이것을 안 폼페이우스는 전투를 단념하고 전장을 떠났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의 군단병은 이때까지 카이사르군의 공격을 버티고 있었으나 새 병력을 교체 투입하는 카이사르의 전술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달아났다.

패잔병들은 진영이 있는 언덕으로 달아났으나 카이사르는 즉시 이 언덕을 포위하였다.

폼페이우스 패잔병들은 곧 항복했으며 카이사르는 관용을 베풀어 이들의 귀가를 선선하게 허락했다.

이것으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최종 결전, 파르살루스 전투는 카이사르의 압승으로 끝났다.파르살루스 전투가 끝나고 카이사르는 적군 사령부에 도달했다.

카이사르는 루키우스 렌툴루스를 비롯한 정적들의 탐욕과 사치에 경악하여 이렇게 외쳤다.

그러나 파르살루스 전투 소식에 크게 사기가 올라간 카이사르군을 공격하자 이에 격분한 카이사르 고참병은 카시우스의 배를 나포하고 그들을 내쫓았다.

카시우스 휘하 폼페이우스군은 그때까지 파르살루스 전투 결과가 카이사르군이 퍼트린 거짓소식인줄 알았다고 한다.로마에서 카이사르는 독재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부사령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기병 대장으로 임명되었다.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로 도주한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였으며, 이곳에서 폼페이우스는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임금을 조종하는 궁중관료들의 명령을 받은 전직 로마군 장교에게 살해당하였다.

이때 카이사르는 당시 알렉산드레이아에서 프톨레마이오스와 그의 누이이자 부인이며 공동 국왕인 클레오파트라 7세 사이의 권력 투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아마 프톨레마이오스가 폼페이우스를 죽이는 데 관여한 탓에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편에 선 것 같은데, 프톨레마이오스의 내시 포티누스가 선물로 카이사르에게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바치자 카이사르는 이를 보고 울었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군과 전투를 벌였고 그때 그는 그의 배에 불을 붙였는데 그 불이 번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불타버렸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에 나일 강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군대를 무찌르고,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의 지배자로 삼았다.

기원전 48년 말, 카이사르는 독재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임기는 1년이었다.

기원전 47년 초 몇 달간 이집트에서 지낸 카이사르는 중동 지역으로 가서 젤라 전투에서 폰토스 왕 파르나케스 2세를 절멸시켰는데, 너무나 빨리 승리를 거두어 그는 과거 폼페이우스가 이런 형편없는 적들과 오랫동안 싸워 거둔 승리를 조롱하였다.

이 승리를 기념하여 그는 원로원에 보낸 서한에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라고 적었다.그 다음으로 카이사르는 아프리카에 남아있는 폼페이우스의 원로원파 잔당을 처리하고자 떠났다.

당시 아프리카에는 폼페이우스의 장인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카이사르의 숙적 소 카토, 아프라니우스, 라비에누스 등의 폼페이우스 잔당이 쿠리오를 격파한 누미디아왕 유바와 연합하여 카이사르와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아프리카 북동부에 상륙하여 루스피나 전투에서 라비에누스와 싸웠다.

이때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가 지휘하는 누미디아군의 맹공에 큰 위기에 처했다.

이 공격에 카이사르 기병은 반격하지 못하고 적의 포위를 막으려 버티고 있었다.

이 조롱에 격분한 카이사르 제10군단의 한 백인대장이 투구를 벗어 던지며 라비에누스에게 자신을 알아볼 수 있게 한 다음 카이사르의 정예인 제10군단의 힘을 보여주겠다면서 그에게 창을 던졌다.

그러나 전투가 불리하게 흘러가자 몇몇 카이사르군은 두려움에 달아났고 카이사르는 한 기병을 붙잡으며 외쳤다.

"적들은 저기에 있단 말이다!" 결국 카이사르는 최대한 길게 진형을 늘어트리며 적을 공격했고 라비에누스의 누미디아군을 흩어놓았다.

루스피나 전투에서 힘들게 승리한 카이사르는 마우레타니아와 연합하여 유바가 없는 누미디아 본국을 공격하게 했다.

마우레타니아에는 시티우스라는 로마인이 있었는데 카이사르는 그를 회유했다.

카이사르는 탑수스를 공격하였고 스키피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군은 군대를 양분하여 카이사르를 봉쇄했다.(탑수스는 바다에 면한 곶 끝에 위치하면서도 육지쪽에는 석호가 펼쳐져 있는데 2킬로미터의 가늘고 긴 육지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탈출을 막으려면 군대를 양분해야 했다.) 기원전 46년에 카이사르는 탑수스에서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소 카토의 군대를 상대하였는데 스키피오군은 중앙에 보병, 좌우익에 기병, 극좌우익에는 코끼리를 배치하였다.

카이사르는 중앙에 기병을 배치했고, 좌우익에는 보병, 극좌우익에는 제5군단 병사를 배치하였다.

전투가 시작되자 코끼리들은 제5군단 병사들의 투창에 전선에서 이탈했고 카이사르 기병은 적군 보병을 뚫고 적군 좌우익의 배후를 포위하였다.

이에 키케로는 「카토」를 저술하여 카토의 행위를 찬양하였고 카이사르는 「안티 카토」를 저술하여 이를 반박했다.

탑수스 전투에서 이긴 뒤 사르디니아와 코르시카를 시찰하고 본국으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크게 개선식을 치르고 10년 임기의 독재관으로 임명되었다.그렇지만 폼페이우스의 아들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히스파니아로 도주하였는데, 카이사르의 옛 부관이자 갈리아 전쟁에서 부사령관을 지낸 티투스 라비에누스도 이들과 함께 있었다.

카이사르는 이들을 격파하고자 파비우스와 페디우스를 파견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후 히스파니아에 직접 다시 출정한 카이사르는 기원전 45년 3월에 문다 전투에서 마지막 저항 세력을 격파하였다.

기병대를 지휘하던 라비에누스가 카이사르군을 유인하기 위해 기병을 이끌고 뒤로간 것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기병대가 붕괴된 것으로 잘못 보아 군대를 퇴각시킨 것이 패인이었다.

이런 가운데 카이사르는 세 번째와 네 번째로 기원전 46년의 집정관(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동료 집정관)과 기원전 45년 집정관(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동료 집정관, 그해말 파비우스가 병사하여 이후 보궐집정관은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에 선출되었다.

카이사르는 아직 히스파니아에서 싸우고 있었으나, 원로원은 그가 부재중인 가운데 영예를 내리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적들을 처벌하지 않고 거의 모두 용서해 주었으며, 그에 대한 대중의 반대도 거의 없었다.

플루타르코스는 내전에서 무찌른 적들이 외국인이 아닌 동료 로마인들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로마인들이 카이사르 승리 이후 열린 개선식이 빈약했음을 알았다고 썼다.

이후 카이사르는 2년 동안 각종 개혁을 실시하였다.

유언장 작성- 기원전 45년 9월에 카이사르는 이탈리아로 돌아오면서 미리 유언장을 썼는데, 자신의 조카손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에게 자신의 이름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상속한다고 썼다.

카이사르는 또 자신이 죽기 전에 옥타비아누스가 죽는다면,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다음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적었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는 1년을 365일로 정하고, 4년마다 윤년을 두었다.

(율리우스력은 158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수정하여 오늘날의 그레고리오력이 되었다) 역법 개정으로 로마인에게 어떤 한 해가(아마 현대 역법으로 기원전 46년에 해당할 것이다)이 445일로 길어졌다.

카이사르는 사이프타 율리아, 마르켈루스 극장(훗날, 아우구스투스가 일찍 죽은 조카를 기리기 위해 극장의 이름에 조카의 이름을 붙였다.)도 건설하려 했다.

카이사르는 도심을 확장하기 위해 세르비우스 성벽을 파괴하기도 했다.

교사와 의사에게 시민권 지급- 카이사르는 로마의 교육과 의료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교사와 의사에게 시민권을 제공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카르타고와 코린토스 재건- 카이사르는 로마세계의 도시개발을 꾀하여 카르타고와 코린토스를 비롯한 도시들을 재건 및 건설하였다.

원로원 체제 약화-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권한을 크게 약화시키는 개혁도 진행시켰다.

사법 개혁- 카이사르는 사법 개혁도 실시하였다.

사법 개혁- 카이사르는 사법 개혁도 실시하였다.

카이사르는 재판이 나온 뒤의 항소를 민회가 아닌 종신 독재관인 카이사르 자신에게 제기하도록 바꾸었다.

교통 규제- 카이사르는 혼잡한 로마의 교통을 규제했다.

갈리아 키살피나 주민에게 시민권 지급- 카이사르는 북이탈리아의 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제공했다.

치안 대책- 카이사르는 기존에는 없었던 치안대를 만들어 치안대책을 강구했다.

카이사르는 치안대를 만들어 이를 방지하였다.

종신 독재관 취임- 기원전 44년 2월 15일 그는 원로원과 민회로부터 종신 독재관에 임명되었고, 성대한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Idus Martias)에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전날 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스카라는 어느 '해방자'로부터 모종의 음모에 대해 어렴풋이 전해 들었으며, 최악의 상황을 우려하여 포룸 계단에서 약간 떨어져서 카이사르 앞으로 갔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마르스 광장에 있는 폼페이우스 극장을 지날 때 원로원 의원 무리가 그를 가로막더니 동쪽 주랑 현관에 붙은 방으로 그를 이끌었다.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다다랐을 때, 원로원 의원인 루키우스 틸리우스 킴베르가 추방당한 자신의 형제를 귀환시켜달라며 청원을 하였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와 수에토니우스 모두 카이사르가 킴베르의 청을 거절하였다고 했는데, 킴베르는 그의 어깨를 잡더니 카이사르의 투니카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킴베르에게 "이건 무례한 짓이야!(Ista quidem vis est)"라고 소리쳤다.

카이사르는 재빨리 뒤돌아보며 팔로 카스카를 잡았다.

카이사르는 도망치려 하였으나, 피 때문에 분별을 잃고 발을 헛디뎌 넘어졌으며 주랑 현관 아랫 계단에 무방비로 쓰러지자, 암살자들은 그를 계속 찔러댔다.

카이사르는 23번 칼에 찔렸다.

그러나 수에토니우스 자신은 카이사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썼다.

플루타르코스도 카이사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그가 암살자 사이에서 브루투스를 보자 자신의 토가를 끌어올려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고 한다.

갈리아 정복 전부터 카이사르를 열렬히 지지했던 로마의 중류층과 하류층 사람들, 특히 카이사르와 함께 많은 전쟁을 치른 고참병들은 소수의 잘난 귀족 무리가 자신들의 우상을 죽인 데 분노하였다.

그러나 그로서는 놀랍고도 분하게도, 카이사르는 조카의 아들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를 이미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로 정해두었으며, '카이사르'라는 막대한 권위를 지닌 이름을 물려주었다.

하지만, 유서에는 포로로마노의 시민들에게 자신의 재산에서 한명당 300세스테르티우스를 지급하라는 내용도 있었기 때문에 유산의 2/3은 그리 많지 않은 돈이였다.(300 세스테르티우스는 매우 큰 액수는 아니었으나, 로마 노동자들의 평균 석달치 급료에 해당하는 돈으로 상당히 좋은 선물이었다)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는 위대한 카이사르의 아들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로마 대중 상당수의 충성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다가올 내전의 궁극적인 결과를 예견하지 못하였는데, 특히 카이사르의 후계자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러하였다.

카이사르가 죽을 당시 겨우 19세의 나이였던 옥타비아누스는 상당한 정치 감각을 입증하였으며, 안토니우스가 새로운 내전의 첫 단계에서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상대하는 동안, 옥타비아누스는 당초 빈약했던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기원전 43년 11월 27일 티티우스 법(lex Titia)이 통과되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카이사르에 충성하던 기병 지휘관 레피두스 세 사람의 제2차 삼두 정치가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

삼두 정치는 기원전 42년에 공식적으로 카이사르를 '율리우스 신'(Divus Iulius)으로 신격화하였으며, 그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는 '신의 아들'(Divi filius)이 되었다.

카이사르가 자신의 관대함 때문에 암살당한 것을 아는 제2차 삼두 정치의 세력자들은 술라 이후에 쓰인 적이 없는 숙청의 공포를 다시 일으켰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필리피에서 공화정파를 격퇴하였다.이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정부였던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였는데, 로마를 지배할 발판으로 이집트의 어마어마한 부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이 마지막 내전에서 악티움 해전을 기점으로 옥타비아누스가 승세를 잡게 되고, 결국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는 신적인 이름을 달고 로마 제국의 첫 황제가 되었다.

당초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파르티아와 캅카스, 스키타이를 침공하고, 동유럽을 가로질러 게르마니아에 다시 진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 문제를 놓고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으며, 또 특히 기원전 80년대에 술라가 처벌자 명단을 공개하던 당시 그가 말라리아에 걸린 것은 이보다는 더욱 확실하다.카이사르는 부분적으로 발작 증세를 보였던 것 같은 기록이 네 가지가 있다.

카이사르는 생전에 로마에서 훌륭한 웅변가이자 산문 작가로 인정받았으며, 키케로도 카이사르의 수사와 문체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카이사르의 대표작인 갈리아 전쟁기가 "알몸과 같고 순수하며 의복과 같은 미사여구를 죄다 벗어 던져버렸을 때 생겨나는 매력으로 충만해있다"며 이어 "카이사르는 역사를 쓰려는 자들에게 사료를 제공할 작정으로 썼을지  모르나, 그 은혜를 입는 자들은 군더더기를 덧붙여 화려하게 장식한 역사를 쓰는  바보들뿐이고, 사려 깊고 현명한 이들에게는 역사를 쓸 의욕마저 꺽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라고 평가했다.

또 각각 알렉산드레이아,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에서 수행한 전투에 대해 쓴 알렉산드리아 전기(De Bello Alexandrino), 아프리카 전기(De Bello Africo), 히스파니아 전기(De Bello Hispaniensi) 이 세 저작도 역사적으로 카이사르의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 저자 여부는 불투명하다.

할아버지 : 루키우스 카이사르

아버지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기원전 100년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7월 12일 로마의 서민지역인 수부라 지구에서 탄생.

기원전 85년 - 아버지 사망.

기원전 82년 - 술라의 이혼 명령을 거부하고 소아시아로 도피.

기원전 78년 - 술라 사망.

기원전 73년 - 로마로 귀국해 제사장 및 대대장이 됨.

기원전 70년 - 회계감사관에 취임(~69년).

기원전 65년 - 안찰관에 취임.

기원전 63년 - 최고 제사장에 취임.

기원전 62년 - 법무관에 취임.

기원전 61년 - 먼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해 현지인인 발부스를 등용.

기원전 60년 - 카이사르, 귀국하여 이듬해 집정관에 출마.

기원전 59년 - 집정관에 취임.

카이사르, 갈리아 총독에 부임.

기원전 52년 - 갈리아 전쟁 7년째.

기원전 52년 - 갈리아 전쟁 7년째.

기원전 52년 - 갈리아 전쟁 7년째.

기원전 52년 - 갈리아 전쟁 7년째.

기원전 52년 - 갈리아 전쟁 7년째.

기원전 52년 - 갈리아 전쟁 7년째.

기원전 52년 - 갈리아 전쟁 7년째.

기원전 50년 - 북이탈리아 속주로 귀환.

기원전 49년 - 원로원, 카이사르에게 '원로원 최종 권고'를 결의.

1월 12일 라벤나를 떠난 카이사르, 1개 군단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도하("주사위는 던져졌다!").

이듬해인 기원전 48년도 집정관에 선출.

기원전 48년 - 카이사르, 그리스에 상륙.

기원전 47년 - 『내전기』 전3권 완성.

기원전 46년 - 탑수스 전투에서 스키피오군을 대파.

기원전 45년 - 히스파니아 속주에서 반카이사르파가 봉기하자 히스파니아로 떠나 문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를 격파.

기원전 44년 - 2월 원로원과 민회, 카이사르를 종신 독재관에 임명.

3월 15일 카이사르, 원로원 회의장인 폼페이우스 회랑에서 브루투스 일당에게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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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캐스트 - 율리우스 카이사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