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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물▣

맥스마케터 2023. 12. 30.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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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셰익스피어(영어: William Shakespeare, 문화어: 윌리암 쉑스피어, 1564년 4월 26일~1616년 4월 23일)는 잉글랜드의 극작가이자 시인이다.

잉글랜드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런던으로 이주하고서 본격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일약 명성을 얻었고, 생전에 '영국 최고의 극작가' 지위에 올랐다.

당대 여타 작가와 다르게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하였음에도 자연 그 자체에서 깊은 생각과 뛰어난 지식을 모은 셰익스피어는 당대 최고의 희곡 작가로 칭송받는다.

셰익스피어는 잉글랜드 중부의 전형적인 소읍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 있는 작은 마을 스트랫퍼드에서 존 아든과 메리 아든 부부의 맏아들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셰익스피어는 주로 성서와 고전을 통해 읽기와 쓰기를 배웠고, 라틴어 격언도 암송하곤 했다.

동시대 극작가 벤 존슨은 “라틴어에도 그만이고 그리스어는 더욱 말할 것이 없다."라고 하면서 셰익스피어를 조롱하기도 하였다.

이 당시에 대학에서 교육받은 학식 있는 작가들을 ‘대학재사’라고 불렀는데, 셰익스피어는 이들과는 달리 고등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타고난 언어 구사 능력과 무대 예술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 다양한 경험, 인간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은 그를 위대한 작가로 만드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셰익스피어는 18세에 여덟 살 연상인 앤 해서웨이와 결혼했다.

셰익스피어는 모종의 이유로 1585년에 햄닛(Hamnet)(1585~1596)과 주디스(Judith)라는 쌍둥이가 태어난 후 곧장 고향을 떠나 7~8년간 떠돌아다닌다.

1580년대 후반, 또는 1590년경 수도 런던에 도착한 셰익스피어는 눈부시게 변한 런던 모습에 매료되었다.

동시대 극작가 로버트 그린 기록을 보면, 셰익스피어는 적어도 1592년 런던에서 유명한 극작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1594년부터 당시 런던 연극계 양대산맥 가운데 하나인 궁내부장관 극단 전속 극작가가 되었다.1599년 템스강 남쪽에 글로브 극장을 신축한 궁내부장관 극단은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승하하고 제임스 1세가 즉위하자 국왕 극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셰익스피어는 이 극단에서 조연급 배우로도 활동했으나 극작에 더 주력하였다.

셰익스피어가 극작가로서 활동한 기간은 1590년~1613년까지 대략 24년으로 볼 수 있는데, 이때 희·비극 포함하여 총 38편을 발표하였다.

악의에 찬 비난도 없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학도 안 나온 작가' 셰익스피어 작품 유명세는 날로 높아져만 갔다.

셰익스피어는 1590년에서 1613년에 이르기까지 비극(로마극 포함) 10편, 희극 17편, 사극 10편, 장시 몇 편과 시집 《소네트》를 집필하였고, 대부분 작품이 살아생전 인기를 누렸다.

이 시기 셰익스피어 명성을 짐작케 하는 말로는 엘리자베스가 남긴 어록이 꼽힌다.

"잉글랜드는 넘길 수 있어도 셰익스피어는 못 넘긴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첫 전기를 출간한 작가 니컬러스 로(Nicholas Rowe)는 셰익스피어가 죽기 몇 년 전 고향인 스트랫퍼드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했다.(1610) 그러나 당시에 모든 작품 활동을 그만두고 은퇴하는 일은 보기 드문 경우였고, 말년에도 셰익스피어는 런던을 계속 방문하였다.

1606년에서 1607년을 전후하여 셰익스피어는 몇 편 안 되는 희곡을 썼으나 1613년 이후에는 그의 창작으로 볼 수 있는 작품이 하나도 없다.

플레처는 셰익스피어의 뒤를 이어 왕의 수족을 위한 실내극을 창작하였다.셰익스피어는 1616년 4월 23일에 아내와 두 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홀의 외동딸인 엘리자베스도 두 차례 결혼하였지만 1670년에 자녀를 남기지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나면서 셰익스피어의 직계는 대가 끊기게 되었다.

셰익스피어는 유언에서 당시 법에 따라 재산의 3분의 1을 상속받을 권리가 있었을 아내 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셰익스피어는 고향의 성 트리니티 교회(Holy Trinity Church)에 안장되었다.

셰익스피어는 각본을 총 36편, 14행시(소네트)를 총 154편 썼다.

셰익스피어 희곡 전집은 1623년 극단 동료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셰익스피어는 생전에 이미 최대의 찬사를 받았고, 죽은 후에도 계속 숭앙의 대상이 되어 거의 신격화되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위대한 인류의 유산이었다.

그는 '온화한 셰익스피어'라고 불리었지만, 인간에 대한 통찰력만큼은 그 누구에도 비할 수 없으며, 근대 영어의 잠재력을 끌어내어 시극미(時劇美)의 최고를 창조하였다라고 평가받는다.

르네상스 시대 대표적인 영국 극작가인 셰익스피어는 사극, 희극, 비극, 희비극 등 연극의 모든 장르를 섭렵하였고, 당대 각계각층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관객층에 대한 호소력으로 크리스토퍼 말로, 벤 존슨, 존 웹스터 등 동시대 탁월한 극작가를 뛰어넘는 성취를 이루었다.

1580년대 말로의 주인공들이 중세적 가치에 거침없이 도전하는 상승적 에너지의 영웅적 면모를 구현하고 있고, 1610년대 웹스터의 주인공들이 인문주의적 가치의 이면에 놓인 어두운 본능의 세계에 함몰되는 추락의 인간상을 대변한다면, 1590∼1600년대에 등장한 셰익스피어의 주인공들은 중세적 속박과 르네상스적 해방이 가장 치열하게 맞부딪히는 과도기의 산물로서 그러한 상승과 추락의 변증법을 극명하게 체현하고 있다.셰익스피어 극은 인간관계에서 생겨나는 문제를 가장 밑바닥에 깔고 있다.

셰익스피어에게 인간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이 없었다면 그의 극이 이처럼 재미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셰익스피어의 인물들은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는 존재들이다.

무엇보다 셰익스피어가 초시대성을 획득하는 극소수의 작가 반열에 드는 것은 특정한 시대정신의 명징한 관념적 표상이 아니라 무한한 모순의 복합체로서의 인간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조화롭게 통합된 존재가 아니라 분열적으로 모순된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치열한 인식이 르네상스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구 문화와 문예를 혁신하는 원동력이었다면, 그러한 인식의 비등점을 이룬 낭만주의, 모더니즘, 실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활발히 탐구되고 공연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박제된 고전이 아니라 살아 있는 고전임을 여실히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셰익스피어의 탁월함은 그의 문학적, 연극적 상상력과 감칠맛 나는 표현력에서도 드러난다.

셰익스피어는 자신이 속한 극장의 구조를 십분 활용하면서 구조의 제약을 뛰어넘는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관객과 독자를 매혹한다.

심지어 현대의 경영학자들이나 정치가들에게도 셰익스피어는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 준다.

또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햄릿의 유명한 대사처럼 셰익스피어는 감히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숱한 명대사를 남겼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인생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그의 작품이 가져다 주는 문학적 향취에 취해 감탄하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대사에는 운문과 산문이 혼재되어 있다.

셰익스피어의 37편의 희곡 작품들은 상연 연대에 따라 대개 4기로 분류된다.

1기는 습작기(1590∼1594)로 이 기간 동안 주로 사극과 희극을 집필했다.이 시기는 옛 작가의 모방과 자신의 것을 찾기 위한 모색의 과정이었다.

우선 <헨리 6세>의 3부작, <리처드 3세>의 사극과 병행하여 세네카풍 복수비극 <타이투스 안드로니쿠스>에서 출발하여 이 시기의 기조는 플라우투스풍의 <실수연발이>, 이탈리아 코믹풍의 <사랑의 헛수고>등 젊은 정열을 발산시키는 경쾌하고 밝은 희극의 세계에 있다.

그러나 제1기말에서 제2기에 걸쳐서는 그린, 말로, 키드, 피일 등 선배의 죽음이 계속되고 릴리도 사실상 극작의 붓을 놓기 시작한 시기였으므로 라이벌이 없어진 셰익스피어는 행운의 극작가로서 자기 길을 걷게 된 셈이며, 초기 낭만비극의 걸작 <로미오와 줄리엣>은 바로 이 무렵에 탄생, 서정과 낭만성이 신인만이 갖는 청신함과 함께 곁들여져 있는 작품으로 천재 극작가로서의 편린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비극과 희극과 사극이라는 모든 장르에 탁월한 극작가로서 명성을 쌓게 된다.

<햄릿>의 싹이 엿보이는 <리처드 2세>나 폴스타프의 개성창조, 극작술의 진보와 함께 셰익스피어의 재능이 훌륭하게 개화하여 인기 독점의 시대에 이른다.

제3기 : 원숙기

이 시기에 씌어진 희극도 끝은 행복한 결과로 맺어졌으나, 매우 음울하여 앞 시기의 작품들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채프먼, 마스턴 등 신진작가들의 대두와 벤 존슨의 눈부신 활약이 있기는 했으나, 그래도 그들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셰익스피어의 창작력은 뛰어난 것이었다.

셰익스피어를 세계 문학사에서 불후의 명성을 지닌 작가로 만들어 준 것은 바로 제3기에 집필된 극작품들일 것이다.

이들 작품에서 셰익스피어는 깊은 인생 통찰을 보여주고 있음과 동시에 걸출한 등장인물들을 창조하고 있다.

제4기(1608∼1613)에 들어 셰익스피어는 비희극이란 새로운 장르를 시험하는데, 당시 희비극의 장르에서 인기가 절정이었던 보먼트와 플레처에게 자극을 받아 쓴 것이 <심벨린> <겨울밤 이야기> <태풍> 등 일련의 로맨스극이으로 이 시기 동안 대중들의 감상적인 기호에 부합하는 네 개의 비희극이 상연되었다.

이 시기에 상연된 《폭풍우》는 셰익스피어의 달관된 인생관을 잘 보여주는 수작이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프로스페로는 이제 연희는 끝났고, 지구의 삼라만상은 마침내 용해되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인간은 “꿈과 같은 물건이어서, 이 보잘것없는 인생은 잠으로 끝나는 것”(4막 1장)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무대에 대한 셰익스피어 자신의 고별사로 받아들여진다.셰익스피어의 세계는 엘리자베스 왕조 연극의 다면성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다.

엘리자베스 왕조 연극의 위대한 완성자로서 영국 연극 뿐 아니라 세계 연극의 발전에 공헌한 공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라 하겠다.

1593년과 1594년에 페스트의 유행으로 극장들이 문을 닫게 되자 셰익스피어는 사랑을 주제로 삼은 두 권의 서사시를 출간했다.

두 시 모두 인기를 얻었고 셰익스피어 생전에 재출간되곤 하였다.

셰익스피어가 활동을 시작했던 16세기 후반의 잉글랜드는 한마디로 전환기였다.

셰익스피어가 위대한 작가라는 것은 이러한 사회변동 양상을 선구자적으로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엘리자베스 여왕이 지배하던 잉글랜드의 16세기 후반은 문예 부흥기일 뿐 아니라 국가적 부흥기였다.

성숙한 문학적 또는 문화적 분위기, 역동적인 사회가 던져주는 풍부한 소재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곳곳에 녹아들었으며, 이를 통해 그의 작품들은 문학작품 이상의 사회와 역사에 대한 참고서 역할까지 하게 된다.그가 극장가에서 두각을 나타낼 무렵에는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출신의 극작가들이 많이 활동하였는데 이들 중 극작가 로버트 그린은 셰익스피어를 향한 질투심에서 그의 학식이 낮은 사실을 이용하여 "라틴어는 조금밖에 모르고 그리스어는 더욱 모르는 촌놈이 극장가를 뒤흔든다"고 은근히 비꼬았다.

그러나 후대인들은 그들을 '대학 출신 재간꾼(University Wits)' 정도로 부르는 데 반해 셰익스피어는 '대가(Master)'라고 불러 위대한 예술적 정신에 대한 예우를 하고 있다.

셰익스피어가 위대한 작가로 추앙받게 된 데에는 운 좋게도 문학적 자양분을 풍부하게 제공하는 시대에 태어났다는 점도 한몫 한다.

셰익스피어는 대학을 다니지 않았지만 자연과 인간의 실제 삶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웠다.다음의 새뮤얼 존슨의 논평은 아마 셰익스피어를 가장 적절하게 평가하는 글일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뜻대로 하세요》 2막 7장에서 제이퀴즈의 입을 통해 우리의 인생을 다음의 7단계로 구분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에서 셰익스피어가 살아있을 때 출판된 것은 19편 정도이고, 1623년에 작품집이 간행되었다.

1623년 출판된 셰익스피어의 작품집에는 희곡이 서른여섯 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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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셰익스피어 편집본 (영어)

오픈 셰익스피어 (전 작품, 검색 엔진, 통계와 모든 오픈 소스) (영어)

오픈 소스 셰익스피어 (전 작품, 검색엔진, 용어 색인) (영어)

셰익스피어의 뜻 : en:The National Archives (영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