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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물▣ 본문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영어: Julius Robert Oppenheimer, FRS, 1904년 4월 22일 ~ 1967년 2월 18일)는 미국의 이론물리학자이다.
미국에 돌아와서 오랫동안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재직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장이 되어 여러 학자들과 함께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한 맨해튼 계획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양복지 안감의 수입상으로서 자리를 잡았다.
8살 아래인 동생 프랭크 오펜하이머가 태어났을 때에는 그의 아버지의 사업은 이미 튼튼한 자리를 잡았다.
초·중·고등학교를 마치는 동안 그의 관심은 광물 표본의 수집, 물리학, 화학 그리고 문학으로 발전해 갔다.
학교에서는 언제나 1등을 놓치지 않는 그의 학업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그의 부모의 걱정은 다른 아이들과는 거의 함께 놀지 않는 그의 성격에 있었다.
14살 때 여름 캠프에서는 고자질했다는 친구들의 오해로 발가벗겨진 채 냉동실에 갇혀서 하루밤을 지새우는 일까지 있었다.
1925년에 하버드 대학교 화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3개월 후에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 캐벤디시 연구소(물리학 연구소)의 J.J. 톰슨 밑으로 유학을 갔다.
오펜하이머는 결국 포기하고 독일 괴팅겐 대학교의 막스 보른 밑으로 옮겨 가서 이론 물리학 특히 양자역학의 화학에의 응용분야인 스펙트럼의 양자론을 공부한다.
또 당시 괴팅겐에 함께 있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볼프강 파울리, 유진 위그너와 엔리코 페르미 등 20세기 물리학을 짊어지고 나가게 되는 젊은 사람들과 함께 어깨를 겨루고 있었다.
하버드 대학교와 패서디나의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 두 군데에서 그에게 자리를 줄 의향을 표시해 왔지만 그는 두 군데 다 거절했다.
그는 버클리 분교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양쪽에 자리를 잡았다.
봄 학기에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가을과 겨울 학기에는 버클리에서 가르치기로 했다.
오펜하이머가 버클리에서 처음 교편을 잡은 것은 1929년 25살 때였다.
교육적 배려가 풍부하고 새로운 일에 대한 영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몸은 가냘퍼서 1m 80cm가 넘는 키에도 불구하고 평생 체중이 59kg을 넘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오펜하이머가 실제로 몇 나라 말을 읽고 쓰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괴팅겐에서 공부하고 있는 동안 단테의 〈신곡〉을 원문으로 읽기 위해서 이태리어를 배웠고 버클리에서는 인도의 철학서적을 읽기 위해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워서 즐기고 있었다고 한다.
희랍어는 이미 고등학교 시절에 마스터해서 호메로스나 플라톤을 원어로 읽을 수 있었다.
버클리에서 사이클로트론을 개발한 어니스트 로렌스를 사귄 것은 오펜하이머의 그 후의 인생을 결정했다.
그 뿐만 아니라 오펜하이머의 이론 물리학과 로렌스의 사이클로트론은 버클리를 세계적인 물리학의 연구 센터로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들은 그들의 성격이나 사고 방식이 전혀 다른데도 불구하고 절친한 사이였다.
"옷피(오펜하이머의 애칭)라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옷피는 이렇게 말했다." 등이 학생들의 말버릇이었다.
카리스마를 갖는 그의 지도력은 이미 버클리 캠퍼스에서 1930년 중반에 길러지고 있었다.
오펜하이머의 정치에의 관심은 1930년대의 중반서부터 고조되어 갔다.
괴팅겐에서의 은사인 막스 보른의 추방으로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가 죽기 1년 전 프린스턴 대학교가 그에게 준 명예 박사 학위의 학위기에 물리학자로서 뱃사람이고 철학자, 마술가(馬術家)이며 언어학자이고 요리인이며 좋은 와인과 시의 애호가 라고 쓰여있던 것처럼 어느 분야에서도 취미의 영역을 훨씬 뛰어넘는 그의 재능과 아름다움에 대한 수준높은 식견 등을 가지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아 그의 집에 걸려 있던 반 고흐의 그림 석 장, 피카소의 그림 한 장, 그리고 르누아르의 그림 한 장 등이 보여 주는 재력(財力)은 그가 살아온 수준 높은 생활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담배를 연발했던 오펜하이머는 1965년 말에 두경부암 진단을 받았다.
슐레진저 주니어, 소설가 존 오하라, 뉴욕시립발레단의 감독 조지 발란신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동생 프랭크와 그의 나머지 가족들이 그곳에 있었다.
오펜하이머의 시신은 화장되었고 그의 재는 유골 단지에 안치되었고, 키티는 그것을 세인트 존 비치 하우스가 보이는 곳의 바다로 떨어뜨린다.1972년 10월, 키티는 62세의 나이로 폐색전증에 의해 합병된 장 감염으로 사망했다.
당시 뉴멕시코주에 있는 오펜하이머의 목장은 아들 피터에게 상속되었고, 해변 부동산은 딸 캐서린 "토니" 오펜하이머 실버에게 상속되었다.
J. Robert Oppenheimer – Berkeley Historical Plaque Project
J. Robert Oppenheimer at the Atomic Heritage Foundation
J. Robert Oppenheimer: An Unparalleled Legacy at the Los Alamos National Laboratory
Robert Oppenheimer at the Federal Bureau of Investigation
The Reith Lectures: Robert Oppenheimer – Science and the Common Understanding, on BBC Radio 4, 1953
Lecture by Dr. Robert Oppenheimer: Freedom and Necessity in the Sciences at Dartmouth College, 1959
Lecture by Dr. Oppenheimer at the University of Michigan, 19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