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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5대 뉴스 ▣ 본문
Article 1:
제 목: "하루 5명 해부했다"…독립군 '마루타'로 죽이고, '벼룩 폭탄' 만든 악마들[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줄거리: 독자 분들이 기억하시듯, 그 테러의 이름은 '탄저균 테러'였다.
백색 가루엔 치명적인 생물무기(BW)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탄저균이 들어 있었다.
일단 이 세균에 감염된 사람은 혼수상태에 빠지고 치사율도 높다.
<선>의 사진부장을 비롯, 탄저균 우편물을 받아 감염된 22명 가운데 5명이 숨졌다.
따지고 보면, 미국의 탄저균의 원조는 '죽음의 부대' 또는 '악마의 부대'라 일컬어지는 731부대의 수괴 이시이 시로(石井四郎, 1892-1959)다.
미국-이시이 사이의 더러운 비밀거래는 걸음마 단계에 있던 미국의 세균전 능력을 크게 높였다(이에 대해선 다시 살펴봄).
1939년 1월1일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 군의소장이 정수기 필터를 점검하고 있다.
말뚝에 사람 묶고 탄저균 생체실험
일찍이 이시이 시로의 731부대는 문제의 탄저균 개발에 나섰다.
731부대가 '악마의 부대'라 비난을 받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살상무기를 개발하면서 산 사람을 생체실험으로 희생시켰다는 사실이다.
이 글을 간추린 '전쟁과 의료윤리 검증추진회'는 이른바 '15년 전쟁'(1931년 만주침공~1945년 패전) 동안 일본이 저질렀던 전쟁범죄와 책임을 규명하려는 양심적 의학자·의사들의 모임이다.
생체실험을 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이 저공비행을 하면서 세균폭탄, 또는 페스트를 비롯한 세균에 감염된 벼룩을 떨어트리는 것이었다.
'마루타'(피실험자)를 기둥에 묶어놓고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전기 장치를 이용해서 폭탄을 터트리는 방식도 썼다.
731부대는 이렇게 각종 세균의 효력을 검사하기 위해 사격장(야외실험장)에서 생체실험을 하였다.
자주 사용한 세균은 (페스트균과 더불어) 탄저균, 탄저열균, 콜레라균과 장티푸스균이었다] (진청민, <일본군 세균전>, 청문각, 2010, 195쪽).
731부대의 야외 생체실험은 실제 전투 지형지물과 비슷한 야외 사격장에서 주로 이뤄졌다.
야외실험을 할 때엔 생물무기인 세균뿐 아니라 화학무기인 독가스 실험으로 '마루타'들을 죽였다.
'특이급'(特移扱)된 '마루타'들
731부대로 '마루타'를 데려오는 것을 일본인들은 '특이급'(特移扱)이란 용어를 썼다.
특별 이송이란 의미를 지닌 마루타 수송은 관동군 헌병의 삼엄한 눈초리 아래 비밀리에 이뤄졌다.
8.15 패전 뒤 소련군에 붙잡혀 하바롭스크 전범재판(1949)의 피고석에 섰던 가와시마 기요시 세균제조부장은 '특이급된 마루타 가운데는 여성과 어린이들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가와시마 세균제조부장은 계급이 군의소장으로, 서열상 이시이 군의중장 바로 아래였다.
'마루타'는 대부분이 반일 성향의 비(非)일본인들이었다.
'마루타' 숫자는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3000명에서 5000명쯤으로 추산된다.
이들 가운데 이름이 확인된 사람은 270명쯤으로 대부분이 중국인이다.
'마루타'로 있다가 살아서 나간 이는 없다.
▲ 일본 관동군 헌병대가 731부대에 생체실험용 ‘마루타’로 희생시킨 사람들 가운데엔 심득룡(沈得龍)을 비롯한 조선 독립투사들도 있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731부대의 생체실험으로 희생된 사람들 가운데 조선 독립투사들도 여러 명이 있었다.
1949년 12월 소련 하바롭스크 전범재판, 1956년 6월과 7월에 산시성 타이위완(太原)과 랴오닝성 선양(瀋陽)에서 열린 특별군사법정 등으로 731부대의 범죄 사실이 부분적으로 알려졌을 뿐이다.
1990년대 들어 특이급 관련 문서들이 잇달아 발견됨에 따라 731부대의 죄악상이 구체적으로 밝혀지기 시작했다.
1997년 한 중국 방송국이 731부대 관련 다큐를 만들려고 헤이룽장성의 당안관(문서보관실)를 뒤지다가 관동군 헌병대의 '특이급' 문서 66건을 찾아냈다.
이들 문서에는 731부대로 끌려간 조선인 고창률(高昌律), 김성서(金聖瑞), 한성진(韓成鎭), 이기수(李基洙) 등 4명의 이름과 나이, 본적이 적혀 있었다.
관동군 헌병대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았을 이들 투사들은 (정식 재판도 없이) 생체실험이란 이름의 또 다른 고문을 731부대에서 받다가 숨졌다.
'남한 출신 마루타' 혼령이 한국에 온다면...
일본군의 전파 탐지에 걸려 함께 붙잡힌 3명의 동지와 함께 심한 고문을 받다가 731부대로 '특이급'됐다(심득룡에 대해선 한원상, '731부대 생체실험 대상된 조선인 마루타 있었다',「민족 21」2002년 9월호.
731부대는 모두 8부로 이뤄졌다.
생체실험을 통한 세균전 준비라는 점에서 731부대의 핵심은 1~4부였다(그밖에 총부무, 교육부, 자재부, 진료부가 있었다).
제1부는 세균연구부로 페스트, 탄저 등 세균에 따라 몇 개 과로 나뉘어졌다.
하얼빈 시내의 일본 육군병원 바로 옆에 공장과 사무실을 둔 제3부는 대외적으로 731부대가 '방역급수'에 전념을 하는 부대로 위장하는 역할을 맡았다(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이 공장에서는 정수기뿐 아니라 벼룩을 이용해 페스트균을 넣는 도자기 폭탄의 용기를 만들었다).
티푸스균 800~900kg, 콜레라균 1톤이나 됐다(전쟁과 의료윤리 검증추진회, 29쪽).
특히 731부대가 악명을 떨친 것은 벼룩을 이용한 페스트 탄 개발과 생산이었다.
1㎡ 당 벼룩 20마리가 있는 방에다 마루타(수감자)를 놔두었는데, 10명 중 6명이 감염돼 그 가운데 4명이 죽었다](전쟁과 의료윤리 검증추진회, 30쪽).
'이시이 기관'으로 중국 전역 아우르다
'방역급수부'로 위장한 일본의 세균전 부대는 731부대 하나만 아니다.
말이나 동물에 대한 생물전을 연구하는 부대로 1936년에 만든 관동군 군마방역창(100부대, 장춘시)도 731부대의 자매 부대였다.
이들 부대들은 각기 부대장이 있었지만, 사실상의 최상급 지휘관은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였다.
일본 군부에서는 이들 5대 부대와 육군군의학교 방역연구실까지 합쳐 '이시이 기관'이라 일컬었다.
이들 부대들은 적게는 500명에서 1500명 규모였고, '이시이 기관' 전체 인원은 1만 명에 이르렀다.
부대 지휘관들은 이시이 시로와 긴밀히 정보를 주고받으며 중국과 동남아 지역에서 생체실험 등의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난징으로 페스트 균을 보냈다면, 받는 곳은 1644부대였을 것이다.
그 가운데 몇 사람은 장티푸스 병균을 예방하는 주사를 맞았다](<전 일본 육군군인이 세균무기를 준비하고 사용한 혐의에 대한 재판자료>, 모스크바외국문서출판국, 1950, 77쪽.
731부대원들은 페스트, 콜레라, 장티푸스 등 각종 세균을 음식물에 넣어 수감자들에게 먹였다.
실험용 사람들은 모두 이름도 없이 번호만 있었다.
처음에는 마음이 무거워서 작업을 제대로 못했지만, 며칠 지나면서 하루에 2~3명 정도 해부할 수 있었다.
동상, 매독, 페스트, 콜레라 등의 실험으로 감염성을 파악해야 할 뿐만 아니라, 병균 독을 유리병에 넣어 혈액으로 세균을 배양하고 날마다 부화기로 세균번식 작업도 했다.
이시이, "눙안 페스트 살포가 가장 효과적"
범인은 물론 이시이 시로였다.
그는 페스트 세균무기가 실제로 어느 정도의 살상력을 지녔을까 궁금했을 것이다.
공식통계에 따르면 이미 1910년에 페스트가 발생하여 확인된 사망자 수가 449명에 이르며, 1929년부터 1932년에도 559명, 1933년에도 624명이 사망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 때문에 눙안은 (731부대의) 대규모 세균실험에 적합한 곳이었다.
세균실험을 하고도, 마치 자연적으로 발생한 페스트 유행으로 가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서이종, '일본제국군의 세균전 과정에서 731부대의 눙안·신징 지역 대규모 현장세균실험의 역사적 의의',「사회와 역사」2014, 제103집).
731부대의 세균전 실험으로 눙안 지역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일본 관동군 방역부는 353명이 감염돼 298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실제 사망자 숫자에 견주어 턱없이 적었다.
따라서 눙안지역 페스트 사망자 수는 일본 당국의 발표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시이 시로도 731부대원들이 만주 눙안 지역에 세균전을 펼쳤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날 회의에 함께 있던 육군성 의무국 의사과장 오쓰카 후미오(大塚文郞) 대좌가 남긴 비망록에 따르면, 이시이는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쓰카의 비망록에 적힌 이시이 시로의 발언은 일본의 역사학자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주오대 명예교수, 일본사)가 일본군 장교의 업무일지를 바탕으로 쓴 논문('陸軍中央と細菌戰')에 실려 있다.
▲ 세균무기 개발에 미친 이시이 시로가 ‘악마의 소굴’로 썼던 731부대 본부 건물.
페스트 균으로 중국 도시들 공격
이시이 시로의 고향마을 카모(加茂)부터 중국 하얼빈까지 731부대를 추적했던 일본작가 아오키 토미키코(靑木富貴子)의 글을 보자.
(세균전) 실시 부대는 지나파견군 총사령부 직할이지만, 직접적 책임자는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가 맡았다.
[구체적 공격 방법은 비 오는 날 4000m 이상 고도에서 세균액을 뿌리고, 저공에서 페스트에 감염시킨 벼룩을 뿌리는 것이었다.
콜레라나 티푸스 균이 기대만큼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페스트균에 감염된 벼룩을 10월 하순 닝보에, 11월에는 진화에 뿌렸다](靑木富貴子, 136-137쪽).
이시이 시로는 페스트 벼룩을 이용한 작전의 성과에 크게 만족했다.
기록 필름을 만들어 일본군 내부에서 크게 선전을 하는 한편으로, 그 뒤 펼칠 세균작전에서 페스트 균을 퍼뜨릴 벼룩 생산에 더욱 열을 올렸다.
쥐벼룩 페스트 담은 도자기 폭탄
잇단 생체실험 끝에 이시이 시로는 페스트 균이 다른 균(콜레라, 장티푸스)보다 독성이 강하고 따라서 치사율이 가장 높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면서 페스트에 감염된 벼룩을 이용한 도자기 폭탄을 만들었다.
소련 하바롭스크 전범재판에서 징역 25년을 선고 받았던 관동군 군의부장 가지쓰카 류지(梶塚隆二, 군의중장)의 진술을 들어보자.
"이시이 시로는 나에게 폭탄에 세균을 넣으면 폭탄이 터지면서 대량의 열량을 방출하여 금속 파편에 넣은 세균이 살아남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시이는) 세균을 그대로 뿌리면 지면에 떨어지기 전에 죽기 때문에 보호막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대량의 페스트에 감염된 벼룩을 사용하기로 했다.
이시이의 말로는, 감염된 매개물로 강물과 음식물을 감염시키는 것도 세균무기를 사용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전 일본 육군군인이 세균무기를 준비하고 사용한 혐의에 대한 재판 자료>, 모스크바외국문서출판국, 1950, 77쪽.
이시이의 말에 나오는 '벼룩을 이용한 페스트 균이 담긴 도자기 폭탄' 개발을 결정하기까지는 숱한 생체실험을 거듭한 뒤였다.
"731부대는 페스트균에 감염된 벼룩을 세균무기로 사용하는 방법을 연구해냈다.
추악한 기록만 남긴 이시이의 세균전
이렇듯 세균폭탄 개발에 미쳐있던 이시이 시로는 1942년 8월1일 1군 군의부장으로 옮겨갔다.
화북지역에서 중국군(국민당군, 공산당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면서 이시이의 세균전 솜씨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토록 많은 '마루타'를 희생시켜가며 생체실험을 했지만, 승리는커녕 기울어진 전쟁의 운동장을 바로 잡을 수 없었다.
1945년 5월 도쿄의 일본 육군 참모본부는 731부대의 세균폭탄 생산을 멈추도록 했다.
패전을 앞둔 마당에 세균전을 펼쳐 그들의 전쟁범죄 목록을 늘리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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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2:
제 목: 이언주, '강성희 사태'에 "국민에게 물리력 가한 것…尹, 사과하라"
줄거리: 국민의힘을 탈당한 이언주 전 의원이 '강성희 의원 사태'에 대해 "국민의 대표인 국회에 대한 모독이다.
대통령실이 국민에게 물리력을 가한 셈"이라며 윤석열 대통령의 사과를 촉구했다.
국민들이 대통령 견제하라고 대표로 뽑아서 보낸 사람"이라며 "동영상을 보니 분명 김용현 대통령실 경호처장이 강 의원에게 물리력을 행사하는 듯한 장면이 나온다.
이후 제압당한 강 의원은 사지가 들리고 입이 막혀 들려 나온다"고 전했다.
이어 "강 의원이 목소리를 높인 건 부적절했지만, 경호처의 행동은 분명한 과잉 경호고 국민의 대표인 국회에 대한 모독이다.
어제(18일) 그 사태는 대통령실이 국민에게 물리력을 가한 셈"이라 목소리를 높였다.
이 전 의원은 "더 기가 막힌 건 그 장면을 흘긋 올려다보고도 무시하고 지나간 윤 대통령"이라며 "조금이라도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분명 경호처에 '그만하라'고 했을 터다.
이 전 의원은 특히 윤 대통령을 향해 "자신은 왕이 아니라 일하라고 뽑아놓은 일개 수임자에 불과하고 강 의원 역시 자신을 감시하라고 국민들이 보낸 수임자임을 인식해야 한다"며 "그러니 (경호처장인) 김용현의 폭행 여부를 분명히 조사해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국민의 대표인 국회 알기를 우습게 아는 대통령의 안하무인적 태도에 분명한 경종을 울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전 의원은 "국가 시스템이 마비되고 사유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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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3:
제 목: 박지원 "총선 80일, 정부·여당의 짜고치는 고스톱이 도 넘어 국민현혹쇼"
줄거리: 박 전 원장은 19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김건희 여사 디올백 문제를 이수정, 김경률 두분이 심각함을 얘기하는 척하며 대국민 사과 운운 등 여론 간보기를 띄우더니 이제는 한동훈 비대위원장도 군불을 땐다"며 이 같이 말했다.
그는 "민주당은 이 문제를 특검에 포함시켜 디올백은 물론 일각에서 제기되는 양주, 화장품 특히 어떤 책을 받았는지 등에 대한 의혹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며 "민주당이 흔들림없이 대처해서 사과로 어물쩍 넘기려는 생각일랑 꿈도 꾸지말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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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4:
제 목: 진중권, '김건희 명품백' 논란에 "정치공작 맞지만, 그걸 왜 받는가"
줄거리: 진중권 광운대 특임교수가 '김건희 명품백' 논란 관련해서 "정치 공작이 맞지만 그걸 왜 받는가"라고 꼬집었다.
그는 "(명품백을) 안 받았으면 정치 공작이 실패할 수 있었는데 그걸 (받아서) 성공을 시켜버린 것"이라며 "받은 부분에 대해서 국민들이 의구심이 있는 것이다.
그는 "그 부분에 대해서 '정치공작이다' 이렇게 넘어갈 수는 없는 문제 아니겠는가"라며 "당연히 당에서도 목소리가 나오고, 김경율 비대위원 같은 경우에 계속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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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5:
제 목: "대선후보였던 노무현은 '그렇게 허무맹랑한 소리를 해도 되냐'고 했다"
줄거리: [인터뷰]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 ①
민주화 이후 최초의 진보정당인 민노당의 창당 주역이자, 최초의 당 대표, 최초의 대선 후보를 지낸 한국 진보정치의 산증인 권영길 전 민노당 대표를 만났다.
권 전 대표는 지금의 진보정당이 존재감을 잃은 이유를 지난 2008년 민노당 분당의 후유증에서 찾았다.
그는 "민노당 창당 자체가 한국의 정치개혁이었다"고 하는 한편, 지금이야말로 더욱 진보정당이 필요한 시대라고 주장했다.
팬데믹과 기후 위기, AI로 인한 일자리 감소 등 과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새로운 진보정당의 건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음은 권 전 대표와 20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프레시안 사무실에서 나눈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가 19일 서울 마포구 프레시안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프레시안 : 2013년 정계 은퇴 선언 후 근황을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다.
권영길 : 많이들 걱정해 주시는 것을 잘 알고 있다.
2015년 자가면역체계 이상에 따른 희소병에 걸렸고, 합병증으로 설암이 생겨 수술을 두 차례 하고 지금까지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
올해는 총선이 있기 때문에 그에 맞춰 다시 진보정당 통합을 위한 활동을 할 생각이다.
프레시안 : 오랫동안 당적 없이 시민사회 활동을 해오신 것으로 알고 있다.
권영길 : 안타깝게도 아직도 무당적이다.
'당이 나뉘어져서 어느 당에도 갈 수가 없다', 그런 얘기를 실제로 저뿐 아니라 과거 민주노동당 열성 당원이었던 분들이 많이 한다.
진보정당 건설에 투신하게 된 배경이 무엇인가.
권영길 : 개인사를 소개하자면, 민족사의 비극을 겪은 사람의 공통된 이야기일 텐데(권 전 대표의 아버지는 빨치산 활동을 하다 작고했다.
평등 사회 건설과 평화, 그 두 개가 내 삶의 기조가 된 것이다.
앞으로의 농민 운동은 그냥 사회과학만 가지고서는 안 된다, 실제로 배추를 어떻게 심어야 잘 되는지와 같은 농사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서 농대를 간 것이었다.
프레시안 : 지금까지의 정치 역정 속에서 이룬 가장 큰 성과가 무엇인가.
권영길 : 가장 큰 성과는 두말할 필요 없이 민노당의 창당이다.
민노당의 창당은 단순히 '또 하나의 정당의 창당'이 아니었다.
한국 사회를 바르게 세우는 첫걸음을 민노당 창당을 통해 뗀 것이라고 생각한다.
좀 과도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민노당 이전에 이 땅엔 정당이 없었다.
지금 '양당이 문제다' 이런 얘기를 많이들 하는데, 애초에 그 이전에 제대로 된 정당이 없었다.
그 강령에 동의하는 사람이 모여서, '우리 이런 사회 만들자' 해서 당원을 구성하고, 그에 따라서 정책을 짜고 활동을 하는 것이다.
근데 민노당 전이나 지금이나 이른바 보수정당이라 하는 당들은 강령이 뭔지 모른다.
한국의 금권 정치, 보수 정치, 패거리 정치, 지역주의 정치 등이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민노당은 노동자, 농민, 서민들이 교육비, 병원비, 노후 걱정, 집 걱정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겠다, 서민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정당을 만들어야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그럼 사회 문제들은 어디서 오느냐, 자본주의가 만든 병적 요소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민노당은 그 자본주의 병폐를 넘어서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는 강령을 내걸고 2년에 가까운 창당 준비 작업을 했다.
1997년 대선이 끝나고 나서 97년, 98년, 99년까지 만 2년을 준비하고 2000년 1월에 창당했다.
마침내 2000년에 창당했다.
그래서 민노당 창당은 창당 자체가 정치개혁이었고 민노당 활동 자체가 한국의 정치개혁이었다.
정치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그리고 정치개혁은 정당이 개혁돼야 이루어진다.
정당이 제대로 서지 못하면 정치개혁도 없는 것이다.
민노당이 제대로 된 정당이었기 때문에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이 박수치고 했던 것이다.
프레시안 : 창당 자체도 의미 있지만 이후 정당 활동도 국민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2004년 총선에서 10석을 얻을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근본적으로 당의 강령·정책 그리고 그에 따른 활동이 뒤따라야 한다.
그렇게 하려는 정당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민노당은 2년간의 긴 창당 과정을 통해서 국민에게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대해 설명을 많이 했는데 그 첫인상이 나쁘질 않았다.
실제로 국민 80% 가까운 지지를 받았다.
정리해고를 막아내는 투쟁이라는 인식을 심어줘서 국민들의 박수를 받았기 때문에, 이런 민주노총이 만드는 정당은 신뢰할 수 있는 정당이라는 기본적 인식이 사회에 깔려 있었다.
실제로 민주당에는 허무맹랑하게 들렸던 것이다.
민주당이 추진한 무상급식, 무상의료도 민노당이 2000년부터 추진했던 것이다.
그리고 새누리당은 민노당이 했던 경제민주화 내걸어서 박근혜 대통령을 당선시켰다.
빨갱이다'라고 했는데, 그게 아니고 '아 민노당의 길이 바른 것이구나, 이렇게 해야 하는 구나' 하는 인식을 가슴 절절하게 느꼈기 때문에 김종인 비대위원장도 영입하고 해서 박 전 대통령이 당선됐다고 할 수 있다.
이걸 다르게 이야기한다면 민노당 같은 진보정당이 한국 사회를 바꾸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프레시안 : 민노당 의원들의 의정 활동은 어땠나.
권영길 : 개개인의 입법 활동보다는 당의 전체적인 활동을 통한 외침을 중요시했다.
당 대표 시절 어떤 기자가 '이래서 진보정당이 필요한 것이구나'라고 한 적이 있다.
한미동맹의 핵심은 북한에 대한 억제인데 미국이 다른 목적을 갖고 한국에 주둔한다면 그것은 기본 정신을 벗어난 것이다.
그래서 왜 이런 한미동맹을 우리가 가져야 하느냐고 한 것이었다.
한국 국회에서 의원이라는 사람이 또 어떤 정당이 공개적으로 이런 이야기한 적이 없으니 놀란 것이었다.
"민노당 분당은 패권 싸움 탓…씻을 수 없는 과오"
프레시안 : 그렇다면 정치 여정 가운데 가장 후회되는 일은 무엇인가.
민노당은 거의 20% 가까운 지지를 받는 길목에서 간판을 내렸다.
스스로 분열을 한 것이었다.
국민들은 한국의 정당 정치에 신물이 날 대로 나고 절망하고 있다가 민노당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봤는데 그렇게(분당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 분당으로 민노당, 한국의 진보정당은 붕괴의 길로 접어들었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서 한국 사회 발전이 정지되어 버렸다.
그야말로 우리가 명실상부하게 내‧외형적으로 국민의 삶의 질이 상승해 세계 모범국가가 됐을 것이다.
한국 정치도 바람직하게 발전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분당은 우리 한국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치명적 과오를 범한 범죄행위라고 저는 그렇게 얘기를 하고 있다.
프레시안 : 노선 투쟁이 아니라 패권 싸움이라고 굳이 강조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권영길 : 노선 투쟁과 패권 싸움 두 개가 다 혼재돼 있을 거다.
민노당 창당 전에 노선 갈등이 없었을까.
민노당 당명 정하는 현장에서 뛰쳐나가는 교수도 있었다.
함께 술도 밥도 같이 못 한다는 그 두 진영을 한 자리에 끌어다 앉혀서 녹였다, 민노당 창당이 진보진영에 한 엄청난 기여다.
프레시안 : 분당의 책임 당사자인데, 그 이후 노 전 의원 등과 함께 당시 분당에 대한 반성적 토론을 하는 등 과정은 없었나.
권영길 : 안타깝게도 그런 것은 없었다.
프레시안 : 분당으로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진보정당 역사를 함께 했던 노 전 의원의 죽음이 큰 충격이었을 것 같다.
그의 죽음이 본인에게, 그리고 이 사회에 남긴 의미가 무엇이라고 보는가.
그런 긴 과정을 함께 했기 때문에 내가 받는 아픔은 다른 사람보다 더 강하다는 게 당연할 수밖에 없다.
노 의원이 지금 살아있다면, 그렇게 가지 않았으면 지금 진보정당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현재 분열돼 있는 4개 진보정당의 통합은 단순히 진보정치 세력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정치의 가장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하려고 했을 것이다.
프레시안 : 많은 이들이 지금 진보정당이 위기에 빠진 이유에 대해 저마다 해석을 내놓는데, 권 전 대표는 그 근본적 이유를 2008년 분당 사태에서 찾는 것인가.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결국 분당 때문에 (진보정당의 위상이) 여기까지 온 것이지, 다른 이유가 없다.
찢어진 당이 하나로 다시 연대‧통합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주장을 하는 것이다.
프레시안 : 많은 이들이 진보정당, 특히 정의당의 위기 원인 중 하나로 정의당이 '민주당 2중대'로 전락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권영길 : 나는 정의당의 '2중대' 논쟁은 잘못된 논쟁이라고 보고 있다.
진보정당은 기본적으로 분명한 가치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노동이다.
'노동 중심의 진보정당'이라는 것은 노동자들만을 위한 정당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 바탕 위에서 기후라든지 성소수자라든지 여러 문제가 다뤄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보정당의 기둥이 뭔지도 모르고 기조도 뭔지도 모르고 심지어는 당원들조차 인식을 못하고 사회적으로 인식이 안 잡혀 있는 상황 속에서 민주당을 따라잡기하는 것처럼 됐다.
그리고 그 결과, 민주당이 마치 진보정당의 표상으로 되어버렸다.
이런 게 문제인 것이다.
협력을 안 하는 게 오히려 더 문제인 것이다.
프레시안 : 민노당이 전성기를 맞았던 시절보다 2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지금 한국 사회에서 민노당이 내걸었던 아젠다가 유효하고, 진보정당의 가치를 노동 중심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말인가.
권영길 :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고등학교 때까지의 수업료 면제는 됐지만, 우리는 한 3단계까지 가야 한다고 했는데 1단계 초입에서 (무상교육이) 멈춘 것이다.
프레시안 : 진보정당 내 통합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권영길 : 지금 현재 우리의 유권자들이 진보정당에 요구하고 있는 게 뭐가 있겠나.
너희들끼리 뭐가 다른지 모른다'라는 것이다.
진보정당이 하나로 돼서 나타나면 그때 찍을까 말까인데, 그게 아니라면 열외가 될 수밖에 없다.
한국 진보는 분열로 들어서서 이대로 가면 완전히 망할 것이다.
프레시안 : 일각에서는 '지금의 진보 정치가 너무 노회화됐다, MZ세대와 공명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새 시대에 맞는 진보정당의 역할과 방향이 무엇인가.
권영길 :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 위기가 왔다.
진보정당이 아니고서는 이 문제를 풀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이것은 정치‧경제‧사회 전문가들뿐 아니라 의학 전문가들도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까 말했듯 기후 위기는 자본 중심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풀어갈 수가 없는 문제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새 사회주의가 요구되고 있고 그렇게 가야 희망이 보인다.
그 역할을 하는 게 새로운 진보정당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소수자나 다른 문제들을 이야기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그걸 위해서라도 진보정당의 제대로 된 역할이 필요하고, 새로운 진보정당이 건설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1차적으로 총선 이후에 진보정당이 새롭게 건설돼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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