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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물▣ 본문
바실리오스 1세(그리스어: Βασίλειος Α΄ο Μακεδών, 811년경 - 886년 8월 29일)는 867년부터 886년까지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그는 전임 황제를 암살하고 제위에 올랐으나 동로마 제국의 뛰어난 황제를 배출한 마케도니아 왕조를 열었고 이른바 마케도니아 르네상스라는 비잔티움 부흥의 발판을 마련한 황제였다.
바실리오스는 아르메니아 혈통으로, 그의 부모가 아르메니아의 농부였는데 아마도 당시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그렇듯이 트라키아로 이주하여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그의 별칭이 마케도니아인(Μακεδών)이 되었는데 사실상 마케도니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대신 그는 힘이 아주 세고 말을 다루는 솜씨가 매우 뛰어났으며 아마도 이 때문에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일설에는 그가 레슬링 챔피언인 불가르족의 거한을 한번에 거꾸러 뜨렸다고도 하며 황제 미카일 3세의 사나운 말을 잘 다루어 황제의 눈에 띄었다고 한다.
미카일에 의해 황궁으로 들어오게 된 바실리우스는 황제의 개인 경호원이자 친구로 있으면서 초고속으로 승진하여 마침내 황제의 시종장이 되었다.
황궁에 들어온 다음 미카일은 바실리우스에게 첫 번째 아내인 마리아와 이혼하게 하고 자신의 첫사랑이자 정부(情婦)인 에우도키아 잉게리나와 결혼하게 하여 그녀를 황궁으로 끌어들였다.
이 때문에 866년 9월 19일에 에우도키아 잉게리나가 낳은 아들 레오는 바실리우스의 아들이 아니라 황제 미카일의 아들이라는 의혹이 있었다.
당시의 기록에는 이미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레오가 미카일의 아들이라는 소문은 거의 일반적이었으며 바실리우스가 평생 레오를 미워한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이 의혹은 아마도 사실로 보인다.
시종장으로서 바실리우스는 점점 권력에 대한 야망을 드러냈고 황제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사실상 황제 미카일을 대신해 제국을 통치하고 있던 황제의 외삼촌 바르다스와 갈등을 빚었다.
강력한 경쟁자를 제거한 바실리우스는 곧 황제를 부추겨 자신을 공동황제로 임명하게 했다.
그러나 이 무렵 미카일은 알코올 중독에 빠져 살았고 술을 먹지 않으면 항상 전차 경주만 생각했기 때문에 사실상 제대로 된 통치를 할 수 없었다.
미카일은 점점 친구인 바실리우스를 멀리하게 되었고 바실리우스의 간섭을 싫어하게 되었다.
결국 바실리우스는 바르다스를 죽일 때처럼 다시 한번 음모를 꾸몄고 867년 9월 24일 침실에서 잠자고 있던 미카일을 암살한 후 스스로 단독 황제가 되었다.
단독 황제가 된 이후 바실리우스는 로마 교회와 사이가 좋지 않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우스를 해임하였다.
바실리우스는 이를 기회로 불가리아를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관할로 만드는 데 성공했으나 교황과의 관계는 다시 벌어지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 서방황제인 루트비히 2세가 남부 이탈리아의 사라센을 몰아내는 데 도와줄 것을 요청해 왔고 이에 응답하여 바실리우스는 871년 해군 함대를 지원군으로 보내어 사라센족의 거점인 바리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바실리우스는 처남 크리스토포루스에게 군사를 주어 파울리키아파를 아나톨리아의 심장부로 몰아나게 하였고 872년에는 주요 거점인 테프라케를 파괴하고 파울리키아파를 거의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군사적 성공뿐만 아니라 바실리우스는 문화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바실리우스는 치세 말기인 10년간 대대적인 건축사업에도 나섰다.
바실리우스의 말년에 총대주교 포티우스는 레오와 바실리우스 사이에서 이간질을 했고 황제를 부추겼다.
바실리우스의 뒤를 이어 레오가 황제에 올랐다.
현제 레오 : 바실리우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됨, 훌륭한 통치로 현제(賢帝)의 칭호를 받음 (미카일 3세의 아들일 수 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