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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물▣ 본문
살라딘, 또는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아랍어: صلاح الدين الأيوبي, 쿠르드어: سهلاحه دينێ ئه يووبى, 페르시아어: صلاح الدین ایوبی, 튀르키예어: Selahaddin Eyyubi, 1138년?~1193년 3월 4일)은 12세기경 티크리트(현재 이라크 북부) 출신의 쿠르드족 무슬림 장군이자 전사였으며 이집트, 시리아의 술탄이었다.
전성기에 그는 이집트, 시리아, 예멘, 이라크, 메카, 헤자즈 등지를 아우르는 아이유브 왕조를 세웠다.
1137년 티크리트의 쿠르드 가문에서 태어난 살라딘은 다마스쿠스에서 학업을 마쳤다.
다마스쿠스에 머무는 10년 동안 누르 앗딘의 법원에서 수니파의 교리를 배운 살라딘은 그의 삼촌인 시르쿠에게서 기초 군사 교육을 마쳤으며, 1160년대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분파와의 전투끝에 승리하여 1169년 삼촌 시르쿠가 장관으로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시작하였다.
예루살렘의 아모리 1세가 통치하는 예루살렘 왕국으로부터 이집트를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한 살라딘은 이집트 왕가의 혼란 속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을 깨고 점차 영향력을 키워갔다.
시리아의 외인부대 지휘관이었던 살라딘은 이름뿐인 칼리프 알아디드가 죽자, 1171년 9월 이집트에 대한 실제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살라딘은 이집트의 경제를 재건하고 군대를 양성하는 한편, 그의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살라딘의 명목상 주인이었던 누르 앗딘과의 마찰을 피했다.
누르 앗딘이 죽기 전까지 살라딘은 가급적 군사행동을 피했지만 이내 십자군과의 대대적인 전쟁에 들어가게 되었다.
1174년 누르 앗딘이 사망하자 살라딘은 이집트의 술탄이 되었다.
그는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독립을 선포하였으며 아이유브 왕조를 세우고 이집트에 수니파 교단을 회복하였다.
1170년과 1172년 살라딘은 누르 앗딘의 예루살렘 왕국 침공으로부터 퇴각하였다.
살라딘은 시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얻게 되기 전까지 예루살렘 왕국이 이집트와 시리아 사이의 완충지대로 남아있기를 희망하였기 때문이다.
누르 앗딘이 통치한 다른 두 대도시 알레포와 모술은 그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살라딘은 이 도시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였다.
살라딘은 1176년과 1186년 이들 도시에 대한 공성에 나섰지만 1176년 5월 22일 알레포 공성 당시 해시시를 먹는 자들(Hashshashins)이라는 정예 암살자 조직 아사신의 공격을 받고 공격을 철수하기도 하였다.
살라딘은 시리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 나갔으며 십자군과의 대규모 전투에서도 늘상 승리하였다.
단 한번, 1177년 11월 25일의 몽기사르 전투에서 살라딘은 패배를 기록하였는데, 예루살렘의 보두앵 4세와 샤티용의 레날드, 성전 기사단 연합군과 맞닥뜨린 살라딘은 대패하여 병력의 대부분을 잃고 본국 이집트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178년 살라딘은 십자군과 휴전 협정을 맺었다.
살라딘은 패전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며 군대를 재건하였고, 1179년 벌어진 십자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어서 레날드는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를 위협하였고, 살라딘은 1183년과 1184년 응징 차원에서 케라크의 레날드 요새를 공격하였으며, 레이널드 또한 1185년 하지의 순례자들을 공격해 보복하였다.
1187년 7월 살라딘은 예루살렘 왕국을 함락시켰다.
1187년 7월 4일 하틴 전투에서 뤼지냥의 기와 예루살렘 왕 트리폴리의 레몽 3세 연합군과 대치한 살라딘은 십자군 부대를 괴멸시켰으며, 십자군의 재앙으로 끝난 이 전투는 십자군 원정사에 전환점이 되었다.
뤼지냥의 기 역시 사로잡혔지만 살라딘은 갈증을 호소하는 기에게 눈을 녹인 얼음물을 대접하며 그의 목숨을 보전해 주었다.
하틴 전투가 있은 지 이틀 후 살라딘은 모든 군인 포로들을 끌어내 목을 벨 것을 명령하였고, 이 처형은 살라딘의 비서인 이마드 앗 딘의 기록에 남았다.
기록에 따르면 살라딘은 감옥에 있느니 죽는게 낫다며 그들의 목을 베라고 지시하였고, 그의 주위엔 많은 학자들과 수피(Sufi) 교도들, 독실한 신도들과 수도자들이 모여들어 칼을 뽑고 소매를 걷으며 자신들의 손으로 포로들을 처형하고 싶다고 애걸하였다고 한다.
살라딘은 밝은 표정을 하고 있었으며 기독교인들의 얼굴에는 절망의 빛이 서렸다고 전해진다(이는 살라딘의 첫 처형이 아니었다.
1179년 8월 29일 살라딘은 바이트 알아존의 성을 함락시켰을 때 700명의 포로들을 처형한 전례가 있다).
바하 앗딘의 기록에 따르면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전 바하 앗딘에게 팔레스타인 뿐 아니라 무슬림에게 속하지 않은 모든 땅을 비신도들로부터 해방시키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한 바 있다고 한다.
이어서 살라딘은 모든 십자군 도시에 대한 정복을 시작하였다.
88년간 십자군 도시였던 예루살렘을 1187년 10월 2일 접수한 살라딘은 본래 협상 같은 것은 하지 않으려고 하였지만, 예루살렘을 사수하던 이벨린의 발리앙은 3천에서 5천에 이르는 예루살렘의 무슬림들을 학살하고 무슬림의 성지를 파괴하겠다는 협박으로 살라딘을 협상에 끌어낼 수 있었다.
도시 안의 프랑크족들은 남녀노소를 불분하고 몸값을 지불하고 무사히 예루살렘을 떠날 수 있게 되었지만 사실상 살라딘은 몸값 일부만을 지불한 사람들도 무사히 도시를 떠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이마드 앗딘의 기록에 따르면 몸값을 지불하지 못한 7천에서 8천 가량의 남녀가 노예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1188년 살라딘은 뤼지냥의 기를 석방하여 그를 그의 아내인 예루살렘의 시빌라에게 돌려보냈다.
하틴에서의 패배와 예루살렘의 함락은 제3차 십자군 원정의 발단이 되었다.
무슬림의 기록에 따르면 전위부대가 잡아온 프랑크인 포로를 살라딘이 목을 베어 처형하자 병사들이 남은 몸통을 난자해 복수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1191년 9월 7일 살라딘의 군대는 사자왕 리처드 1세의 군대와 맞닥뜨렸다(아르수프 전투).
비록 살라딘은 전투에서 패배하였지만 리처드 역시 예루살렘을 정복하는데는 실패하였다.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원정에서 이탈한 지 오래 지나지 않은 1193년 3월 4일, 살라딘은 다마스쿠스에서 눈을 감았다.
기독교도들과의 많은 전투에도 불구하고 살라딘은 유럽에 관대하고 예의바른 사람으로 알려졌으며, 14세기경 그를 칭송하는 많은 시들이 나타났다.
살라딘은 특히 리처드 1세의 존경을 샀는데, 리처드 1세는 살라딘을 위대한 왕으로 평하며 의심할 여지 없이 이슬람 최고의 지도자라고 하였다.
살라딘의 자비심을 보여주는 일화가 1191년 4월에 발생한 바 있다.
1152년 - 시리아의 군주 누르 앗딘의 군대에 들어가다.
Baha ad-Din, The Rare and Excellent History of Saladin, ed.
R. Gibb, The Life of Saladin: From the Works of Imad ad-Din and Baha ad-Din. Clarendon Press, 1973.
Jackson, Saladin: the Politics of the Holy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2.
John Gillingham, "Richard I", Yale English Monarchs, Yale University Press,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