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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물▣ 본문
영국 유학을 다녀왔으며, 인도의 영국 식민지 기간(1859~1948) 중 대부분을 영국으로부터의 인도 독립 운동을 지도하였다.
영국의 제국주의에 맞서 반영 인도 독립운동과 무료 변호, 사티아그라하 등 무저항 비폭력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인도의 작은 소공국인 포르밴더의 총리를 지냈던 아버지 카람찬드 간디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종교는 부모의 영향으로 힌두교이다.
사실 간디는 가난하지 않은 풍족한 삶을 대학교까지 즐겼다.
간디는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인도의 아버지'라고 여겨지고, 보통 바푸(구자라티어: 아버지의 사랑)라고 불렸다.
간디는 인도 서부에서도 사우라슈트라 주의 유명 항구도시인 포르반다르의 명문가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배움은 없었으나 아들의 말을 믿어주고 배려하는 분이었으며, 어머니는 힌두교의 교리와 전통을 성실하게 지키는 신실한 힌두교 신자였다.
간디는 청소년 시기에 방황하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따뜻하게 감싸주심을 경험하면서 자연스레 상처를 치유했다고 한다.
간디는 아내와 그 뒤 방탕한 생활을 버리고 힌두교의 교리를 충실히 지키며 성욕(sex)을 자제하기도 했다.
대학생 시절 아버지 친구의 권유로 영국 유학을 결심하였는데, 당시 힌두교에서는 그의 유학을 좋아하지 않았다.
영국에서 유학하고 온 청년들이 서방의 자유로운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힌두교 전통을 무시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는데, 당시 힌두교 원로지도자들은 간디를 배웅하면 벌금을 물리기로 결의할 정도로 격렬하게 그의 유학을 반대하였다.
3년간의 영국유학생 시절 간디는 공부에 열중했으며, 개인적인 도덕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다행히 채식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알려주는 책과 식당을 알게 되었으며, 런던 채식주의협회 집행위원이 되었다.
그는 어린시절 영국처럼 강해지려면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한 친구의 말에 감화되어 고기를 먹은 적도 있었지만, 힌두교 신자로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간디는 영국 런던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University College London: UCL)에 입학, 법학을 공부하여 1891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인도 라지코트와 봄베이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법정에서 말 한 마디 못하고 물러날 정도로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간디는 1년간의 계약으로 남아프리카의 인도계 상사에서 근무하였는데,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의 생활은 간디가 백인들에게 교통시설 이용, 취업 등에서 차별당하는 동족들을 보면서 독립운동을 다짐하게 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인 트란스발 정부가 인도인 이민 제한을 위해 부과한 지문 등록을 거부하는 운동을 일으키다가 여러 번 투옥되었으나, 마침내 철회를 쟁취하였다.
남아프리카의 프리토리아에서 살던 시절 간디는 동포들이 처한 상황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권리와 의무를 찾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1894년 6월, 1년 계약이 끝나고 환송잔치 자리에서 우연히 나탈 의회가 인도인의 선거권 박탈을 입법화하려 한다는 신문기사를 읽게 됐다.1894년 7월 정치운동가로 변신한 그는 나탈 식민지 지방의회와 영국 정부에 보낼 탄원서를 작성하고 수백 명의 서명을 받았다.
1915년 이후 1918년까지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입장에 서기는 했지만 정치활동에는 잘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 독립을 시켜주겠다고 했던 영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1919년 반영 운동을 하면 체포 영장 발부 등의 적법한 절차없이 무조건 잡아갈 수 있는 즉, 반영운동을 이전보다 더욱 가혹하게 탄압할 수 있는 롤래트 법이 제정되자 그는 영국의 지배에 다시 반기를 들고 "우리는 빵을 구했지만 돌을 받았다"고 항의하면서, 전 인도인에게 영국 상품의 불매·납세 거부·공직 사퇴 등 영국에 대해 폭력없이 저항을 할 것을 호소하였다.
1922년 체포되었으나 병으로 출옥하였으며, 1925년 국민 회의파 의장이 되었다.
1942년 영국에 대하여 인도 철퇴의 요구, 불복종 운동을 일으키다 투옥되었다.
한편, 김성수 전 동아일보 사장(호 인촌)이 본인(간디)에게 엄혹한 일제 치하에서 우리 민족과 언론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조언을 구하자 이에 대한 답신을 인촌 선생에게 보냈는데 이 편지는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의 근거지였던 인도 서부 사바르마티에 다른 유품들과 함께 보관되어 있다.
당시 종교갈등으로 수만 명이 학살당하자, 간디는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일하였다.
간디는 노벨 평화상 수상 후보자에 4번이나 올랐으나 끝내 수상하지 못하였다.
아버지 : 카람찬드 간디
《자녀:할리랄 간디,마닐랄 간디,람다스 간디,데브다스 간디》
《힌두 스와라지(Hind Swaraj)》(안찬수 역, 출판사 강, 2002)
진실을 사랑하고 기만을 증오하였으며, 사회악에의 철저한 반항이 정치 활동의 강한 원동력이 되었다.
1918년 인도 국민회의의 지도자 역할을 맡은 것을 전후로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서면서, 간디는 인도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고 평가된다.
또 그 때부터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마하트마(Mahatma)’로 불리게 되었다.
1999년 4월 18일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지난 1천 년간의 최고의 혁명으로 영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한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운동을 선정하였다.뉴욕타임스 1999년 4월 18일자 "Best Revolution; The Peacemaker"
간디는 종교적으로 너그러워서 힌두교 이외의 종교인들과도 교류하였다.
스탠리 존스가 간디에게 기독교가 민중들에게 다가서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지혜를 구하자, 간디는 "예수 그리스도 같은 삶"을 제안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때에는 전쟁에 협력하면 인도를 독립시켜주겠다는 영국의 회유에 현혹되어 인도의 전쟁가담에 관여했는데, 이는 그의 비폭력주의에 어긋나는 점이 있다.
참고로 비폭력주의는 대국인 인도 실정에는 부합할 수 있지만 약소국의 독립운동으로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어 실제로 많은 식민지 나라들이 이를 채택하지 않았다.
간디는 불가촉천민에 대한 사회적 차별에 분노했지만 결코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카스트제도를 떠받치고 있는 힌두교를 옹호하는데 일생을 보냈다.
2018년에는 간디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면모에 반발하여 아프리카 가나 수도에 있는 가나 대학교에서 간디의 동상을 철거한다.
새색시에게 몸으로 자신의 몸을 따뜻하게 해 줄 것 부탁했는데, 알몸으로 간디의 몸을 데워 주었던 대부분의 여성들은 다른 여자들에 대한 질투심이 있었지만 간디로부터 받는 사랑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서 거절하지 못했다.어린 소녀들과 동침한 일에대해 평소 고백을 하기도 했었지만, 실상은 서양의 회춘법인 스네미티즘을 신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나치게 엄한 아버지그의 아들 할리랄 간디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인도 독립운동 등에 투신하며 '작은 간디'라는 이름을 얻으리만큼 노력하였으나, 자식을 소유물로 여겨 모든 것을 지배하려던 아버지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이슬람교로 개종한다.
위대한 남자들도 자식 때문에 울었다의 저자 모리시타 겐지로부터 '아들은 아버지의 위대한 삶을 위한 제단에 바쳐진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아내가 죽고 며칠 뒤 그는 학질을 앓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그는 영국인 의사에게 진료를 부탁했다.
장염에 걸렸을 때에는 영국인 의사의 시술을 받기도 하여 비판을 받고 있다.박찬빈
스와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