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향남이끄시는교회
- 윤동주눈감고간다#윤동주#맥스글로벌마케팅
- 향남이끄시는교회#김상웅목사#향남교회#발안교회
- 2023년종합소득세
- 윤동주양지쪽#윤동주#양지쪽#맥스글로벌마케팅
- 파이썬#전역변수#루프탈출
- wifi
- 향남이끄시는교회#
- 마케팅도구
- 시인윤동주
- maxglobalmarketing
- 향남교회#
- 파이썬 jpg를 jpeg로
- Today
- Total
맥스글로벌마케팅★MGM★Max Global Marketing
▣오늘의 인물▣ 본문
아이작 뉴턴 경 FRS(영어: Sir Isaac Newton FRS, 율리우스력 1642년 12월 25일~1726년/1727년 3월 20일, 그레고리력 1643년 1월 4일~1727년 3월 31일)은 잉글랜드의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이다.
1687년 발간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는 고전역학과 만유인력의 기본 바탕을 제시하며, 과학사에서 영향력 있는 저서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 저서에서 뉴턴은 다음 3세기 동안 우주의 과학적 관점에서 절대적이었던 만유인력과 3가지의 뉴턴 운동 법칙을 저술했다.
뉴턴은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과 그의 중력 이론 사이의 지속성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지구와 천체 위의 물체들의 운동을 증명함으로써, 태양중심설에 대한 마지막 의문점들을 제거하고 과학 혁명을 발달시켰다.
뉴턴은 또한 첫 번째 실용적 반사 망원경을 제작했고, 프리즘이 흰 빛을 가시 광선으로 분해시키는 스펙트럼을 관찰한 결과를 바탕으로 빛에 대한 이론도 발달시켰다.
또한, 그는 실험에 의거한 뉴턴의 냉각 법칙을 발명하고 음속에 대해서 연구했으며, 뉴턴 유체의 개념을 고안하였다.
수학적 업적으로 뉴턴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 함께 미적분학에 기여했다.
또한, 그는 일반화된 이항정리를 증명하고, 소위 뉴턴의 방법이라 불리는 미분 가능한 연속 함수 f에 대해 방정식 f(x)=0{\displaystyle f(x)=0}에서 미분계수와 접선을 반복해서 구하여 근에 근사하게끔 하는 방법을 발견하고, 거듭제곱 급수의 연구에 기여했다.
갈릴레이가 자연현상이 수학적으로 잘 표현된다는 점을 보여주었고, 뉴턴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제목으로 그가 만든 역학을 출판하였다.
17세기 말경 뉴턴은 물체에 가해지는 힘이 속도가 아니라 가속을 일정한 비율로 증가시킨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뉴턴은 1687년 물체의 운동에 관한 3가지 법칙을 《프린키피아》에서 증명했다.뉴턴은 2005년 영국 왕립학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아이작 뉴턴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중에서 과학사에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인류에게 더 큰 공로를 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 설문 조사에서 2가지 항목 모두에서 우세를 보임으로써, 여전히 과학자들에게 영향력이 있음이 입증했다.
뉴턴은 전통적인 기독교 성직자는 아니었지만, 신앙심 또한 깊었다.
아이작 뉴턴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행하였다.
아이작 뉴턴은 율리우스력 1642년 12월 25일 성탄절에(그레고리력 1643년 1월 4일), 잉글랜드 동부 링컨셔주 울즈소프에서 농부인 아이작 뉴턴 시니어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이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뉴턴은 성공회 사제인 그의 양아버지에게 적대감을 보였는데, 이런 사실은 뉴턴이 쓴 "19살까지의 죄 목록"에도 적혀 있다.
뉴턴의 어머니는 아이를 3명 더 낳았으나 8년 후, 양아버지가 죽자 돌아왔다.
1661년 6월 뉴턴은 선생님의 제안으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그 시절 대학의 가르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었는데, 뉴턴은 이를 르네 데카르트와 같은
이 시기 뉴턴은 2년 동안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그의 위대한 업적의 대부분은 이 시기, 즉 1665~1666년에 싹튼 것으로, 유명한 사과의 일화도 이 무렵의 일이다.
2년간의 한적한 시골살이는 과학과 철학에 대한 사색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며, 이 시기에 수학, 광학, 천문학, 물리학의 중요한 발견들을 해냈다.
그래서 뉴턴 스스로도 2년간의 휴학 기간에 대해 "발견에 있어서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평가하였다.
1667년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다시 문을 열자, 뉴턴은 다시 케임브리지 대학교로 돌아와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이듬해에는 반사 망원경을 만들었다.
이 공로로 뉴턴은 1672년 왕립학회 회원으로 뽑혔다.
이보다 앞선 1669년에는 뉴턴의 지도 교수였던 아이작 배로 교수의 뒤를 이어서,
케임브리지 대학교 수학과 교수가 된 후, 미적분학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때 뉴턴이 했던 기여들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의 우선권 문제로 오랫동안 논쟁이 계속되기도 하였다.
뉴턴은 색은 빛의 기본 요소이며, 백색광은 스펙트럼상의 모든 색이 합쳐진 결과라고 결론 내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논쟁이 계속되었다.(단, 오히려 라이프니츠와 뉴턴이 서로의 수학적인 업적들을 인정하고 존경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번외로, 뉴턴은 실험한답시고 자신의 눈을 찔렀었다 (몇달 앓긴 했으나 나아졌다).
만유인력의 구상은 오래 전부터 싹이 터 있었으나, 요하네스 케플러의 행성 운동에 관한 3가지 법칙,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지상 물체의 운동 연구,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의 진동론 등을 종합·통일하기 위하여, 이론적 연구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
물체 운동 및 만유인력의 기초 법칙을 2대 지주로 하는 이론 역학을 세운 것은 그의 저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였으므로, 착상 이래 20년 후의 일이었다.(사람들은 흔히,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진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생각해낸 뉴턴의 모습을 떠올린다.
이는 나중에 스터클리의 ‘아이작 뉴턴경의 삶에 대한 회고록(Memoirs of Sir Isaac Newton’s life)‘에 실려 세상에 공개되었다)뉴턴은 1684년 핼리 혜성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한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와 행성 운동에 대해서 토론할 정도로 천문학에도 식견이 있었다.
1717년, 뉴턴은 에테르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실험을 고안했다.
뉴턴은 이것을 공기보다 더 적게 존재하는 미묘한 에테르를 통해 열이 전달되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뉴턴은 국회의원(1689년)과 왕립 조폐국의 국장(1696년) 등의 사회 활동, 연금술사로서의 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앙숙 관계였던 로버트 훅이 죽은 뒤, 뉴턴은 런던 왕립학회의 의장(1703년)에 취임하였다.
뉴턴은 앤 여왕에 의해 1705년에 최하위 훈작사 작위를 받기도 했다.
뉴턴은 성공회신자였지만 그의 생활은 청교도적이었다.
뉴턴은 1727년 3월 31일 84세의 나이로 잠자던 중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
가 뉴턴의 묘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는 웨스터민스터 묘비문에 쓰이지 않았고, 실제로 쓰인 뉴턴의 묘비문은 다음과 같다.
미분과 적분을 한데 묶어주는 핵심적 정리인 미적분학의 기본정리는 뉴턴이 활동하기 이전에 증명되지 않은 채 알려져 있었고, 아일랜드 수학자 제임스 그레고리(James Gregory, 1638–1675)가 처음 증명을 출판하였다.
영국 수학자이자 뉴턴이 다니던 케임브리지 수학과 교수인 아이작 베로(Isaac Barrow, 1630–1677)도 증명을 출판하였다.뉴턴은 미적분학을 더욱 발전시키고(라이프니츠와 겹치는 부분이 많고, 이는 수학사에서 심심찮게 있는 일이다.), 함수의 근을 구할 때 미분을 해서 접선을 반복해서 그어 근에 수렴하게 하는 방법인 뉴턴법 (뉴턴-랩슨법)을 만들었다.
뉴턴 물체의 운동에 관한 3법칙
뉴턴의 운동법칙은 물리학에서 물체의 운동에 관한 역학적 기본 법칙이다.
일반적으로 고전 역학의 기초인 뉴턴의 운동의 세 가지 법칙을 이르는데, 제1법칙은 관성의 법칙, 제2법칙은 가속도의 법칙, 제3법칙은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다.
뉴턴의 과학적 발견은 정밀하며 중력의 힘을 수학적 물리량으로 발견한 것이다.
그의 시대에 그는 중력의 역제곱 법칙을 밝힌것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갈릴레오의 책을 읽고 자신의 실험을 수행하면서 뉴턴은 지표면에서의 중력의 힘이 사과를 지면으로 끌어당기는 힘이라는 것을 알았다.
초기에 그의 책 1권에서, 뉴턴은 중력의 개념을 공식화했다.
만약 너무 세다면 달의 경로를 너무 많이 휘게 하여 달이 자신의 궤도로부터 지구로 끌려오게 될 것이다.
결국 그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설명했다.
뉴턴은 수학적으로 증명된 전제들을 가지고 천체현상으로부터 물체를 태양이나 몇몇 행성으로 향하게 하는 중력을 유도해 낸다.
뉴턴은 프린키피아 3권에서 자연 철학의 두 개의 주류의 통합을 달성했다.
뉴턴은 프리즘을 연구했었는데, 프리즘으로 하는 초기 실험에서 뉴턴은 다른 색들은 꺾이거나 다른 각도로 굴절된다는 "굴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프리즘과 벽 사이에 바늘 구멍이 있는 다른 카드를 놓고 완전 적색 또는 청색의 광선이 분리되어 두 번째 프리즘을 통과하도록 하였다.
또한 뉴턴은 "빛은 다른 굴절성의 광선들의 집합이다"라고 정리했다.
뉴턴은 새로운 빛과 색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두개 더 독창적인 실험들을 고안해냈다.
렌즈를 이용해 다른 색 광선들을 합성시키면 원래의 흰색 빛으로 복원시킬 수 있는 것이다.
독실한 청교도 신자인 뉴턴은 어느 제자가 하느님이 없다고 주장하자, "하느님에 대해서 불경하게 말하지 말게.
그리고 심판 날 후에도 사람들은 계속 땅에서 살 것이며, 단지 1000년 동안이 아니라 영원히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역사가 스티븐 스노벨렌의 말에 따르면, 그는 그리스도의 임재가 여러 세기 후에 먼 미래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그 이유가 주위에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사상들이 뿌리 깊이 퍼져있는 것을 몹시 비관했기 때문이었다.
뉴턴은 연금술에 대해서 연구하였는데, 연구 기록물이 노트 3권 가량이나 되었다고 한다.
뉴턴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추천으로 국회의원을 역임했는데, 성격이 조용해서 국회의원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뉴턴은 《광학》 제4권에서 물리학 전체를 포괄하고 자신이 선택한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통일 이론을 소개하려고 했으나, 그가 책상에 촛불을 켜둔 채 외출했다가 그가 기르던 개인 다이아몬드가 초를 물어서 던져버리는 바람에 아직 공개하지 않은 그의 연구들이 모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뉴턴은 조폐 공사의 사장에도 임명되었는데, 그는 화폐 위조범을 잡아 처형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뉴턴은 젊은 시절에 약혼한 여성이 있었으나, 그가 연구와 일에 매우 몰두하였기 때문에 결혼까지 이어가지는 못하였고, 평생동안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뉴턴은 손으로 발명품을 만들어 내는 공작에 재능이 있었는데(참고로, 어린 시절에도 뉴턴의 공작 솜씨가 아주 뛰어나서, 초등학생이었던 시절에 학교가 끝난 후, 자신이 직접 만든 물레방아를 돌리고 있었는데, 뉴턴의 솜씨를 샘낸 한 아이가 돌을 던져서, 물레방아를 부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화가 난 뉴턴이 그 아이를 흠씬 팼다는 일화도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학생일 시절에 휴대할 수 있는 초롱불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뉴턴은 남해 회사 주식 사건으로 인해서 2만 파운드를 잃은 적이 있었는데, 이 때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어도, 사람의 광기는 도저히 측정할 수가 없다.("I can calculate the movement of the stars, but not the madness of men")"라고 말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뉴턴이 어떤 학자와 식사 약속을 잡았다.
문제를 푼 후 뉴턴은 집으로 돌아왔다.
연구하는 도중에 배가 고파진 뉴턴은 하인에게 계란을 가져오라고 했다.
뉴턴의 명언들
"인류 역사상 뉴턴이 살았던 시대까지의 수학을 놓고 볼 때, 그가 이룩한 업적이 반 이상이다."(독일의 수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가 말한 뉴턴에 대한 명언이다.
흔히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미적분학을 누가 먼저 발견했는가를 놓고 사이가 나빴다고 생각하는데, 미적분 논쟁 초기에 두 사람은 오히려 상대방의 수학적인 업적들에 대해서 서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뉴턴은 "지금까지 태어난 가장 위대하고 유례없는 천재였다" - 데이비드 흄
뉴턴은 "과학사에서 대적할 자가 없는 거인"이다.
뉴턴은 "마지막 마법사이자, 바빌로니아인이였으며, 수메르인이였다." - 존 메이너드 케인즈
1684년 물체의 궤도 운동에 관하여(라틴어: De motu corporum in gyrum)
1687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틴어: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뉴턴이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의 출판 비용 지원으로 1687년 7월 5일에 출판하였다.
유명한 만유인력의 법칙을 설명할 뿐만이 아니라, 뉴턴 운동 법칙을 통해서 고전역학을 완성한 근대 과학의 명저로 꼽힌다.
1733년 다니엘의 예언과 요한의 묵시록에 관한 평론(영어: Observations upon the Prophecies of Daniel, and the Apocalypse of St. John)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O’Connor, John J.; Robertson, Edmund F.
아이작 뉴턴의 작품 - 리브리복스 (퍼블릭 도메인 오디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