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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물▣ 본문
월터 일라이어스 "월트" 디즈니(영어: Walter Elias "Walt" Disney, 1901년 12월 5일 ~ 1966년 12월 15일)는 미국의 애니메이터이자 영화 감독, 성우, 기업인이다.
'미키 마우스'를 창조하여 한층 인기가 높아졌다.
그 뒤 <미키> <도널드> 등 많은 만화 영화를 제작하였는데, 삼원색 방식에 의한 최초의 천연색 영화인 <숲의 아침>으로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1937년 세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제작하여 개봉하였는데 당대에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는 형인 로이 디즈니와 함께 1923년에 창립했고 현재까지도 꾸준히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있다.
월트 디즈니는 허모사 지구에서 아버지 일라이어스 디즈니와 어머니 플로라 콜 사이에서 태어났다.
월트가 4살 때, 월트의 부모는 시카고의 번잡한 도시생활이 아이들의 교육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월트는 형들과 달리 그림에 무척 관심이 많은 듯 하다.
그 즈음 월트는 아는 의사 선생의 말을 어른 못지않게 잘 그리는 등 그림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월트가 7살이 되었지만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아버지와 함께 신문팔이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월트의 노력에 감동받아 이를 허락해 주었고, 근처의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월트는 부대의 상점에서 일하게 되었고,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그러면서 월트의 그림 솜씨는 온 부대에 알려지게 되었고 군인들은 월트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1919년, 월트는 본격적인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캔자스로 갔다.
그러다가 광고용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회사에 들어가 인형을 움직이면서 촬영하는 1분짜리 애니메이션 광고를 만들기 시작했다.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탄생
월트는 집의 차고를 스튜디오로 개조해 거기서 다니던 회사의 카메라를 빌려다 영화적인 기교를 익혔다.
당시 애니메이션에 관심 있던 사람들의 필독서였던 E.G 러츠의 애니메이션 교습서만이 월트의 유일한 교과서였고 그것을 읽으며 월트는 셀 애니메이션의 기본기를 익혔다.
회사에서의 낮일이 끝나고 나면 월트는 어브 아이웍스 등의 동료들과 함께 캔자스 시티 미술학원에 다니며 드로잉 수업을 들었다.
그러나 새로운 매체에 관심이 많았던 코거조차도 셀 애니메이션의 제작에 필름을 쓰는 일에는 반대했고 월트는 결국 자력으로 첫걸음을 내딛을 수 밖에 없었다.
'래프 오 그램 (Laugh-O-Gram)'이라고 이름지은 1분짜리 애니메이션 필름 릴을 회사 동료였던 하먼 형제와 만들어서 뉴먼 극장의 주인 프랭크 뉴먼을 찾아갔다.
월트가 찾아간 뉴먼은 예전에 월트가 일했던 미술가게의 페스먼이 소개해준 자였는데 1분의 짧은 시사를 마친 뒤 지체 없이 그 필름을 사고는 월트와 시리즈 계약도 맺었다.
훗날 월트는 자신의 작품명을 따 래프 오 그램 필름사를 설립하고 미성년자의 신분으로 그 회사의 사장이 된다.
월트는 일생을 통틀어 어릴 때 살던 마을 마셀린을 잊지 못했다.
디즈니 영화가 늘 동물과 숲, 농경과 같은 끊임없는 목가적 꿈을 펼쳐오는 것도 마셀린이 월트에게 남긴 기억들이 새롭게 조직되는 과정에서 출현했다고 훗날의 분석가들은 말한다.
월트는 여기서 기차에 대한 동경과 작은 동물들과 함께 놀던 추억을 가지게 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공동체 삶의 긍정적 희망을 발견하기도 했다.
최초의 디즈니 스튜디오
재정적인 문제로 래프 오 그램의 운영이 쉽지 않았던 월트는 새로운 시작점을 헐리우드로 결정지었지만 당대 애니메이션의 중심지는 당연 뉴욕이었다.
이전에 형과 함께 개고생을 하며 만든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 필름을 가지고 계약을 해볼 심산으로 여러 스튜디오 문을 두드렸지만 길은 열리지 않았고 결국 실사영화의 감독이 되는 것도, 앨리스 코미디를 파는 것도 몇 개월만에 모두 포기했다.
위기 속에서도 기회는 찾아왔는데 헐리우드 역사상 최초의 여성 배급자인 마거릿 윈클러가 월트 디즈니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워너 브라더스의 비서인 동시에 자신만의 캐리어 확장을 꿈꾸던 그녀는 애니메이션 배급에서 이미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월트의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를 보자마자 시리즈의 성공 가능성을 점치고는 시리즈 배급계약을 제의했다.
그렇지만 계약을 끝난 뒤에도 월트를 괴롭혀왔던 돈은 여전히 커다란 벽이었다.
심지어 초창기의 일이지만 월트와 영화를 같이 제작하기 시작했다.
형제는 마침내 1923년 10월에 디즈니 브라더스 스튜디오의 첫 간판을 달았다.
월트가 제작한 영화의 배급을 맡던 찰스 민츠와의 긴장이 가시기도 전에 월트가 제작한 영화 '앨리스 코미디 시리즈'의 주인공 버지니아 데이비스와 스튜디오 사이에서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스튜디오에 애니메이터들이 대거 고용되면서 앨리스 코미디는 달라지고 있었고 돈과 배급과 배우의 문제가 계속 얽히면서 스튜디오의 분위기도 나빠지고 있었다.
단시간에 너무 많은 영화가 나온 앨리스 코미디는 이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고 비슷한 내용으로 장장 쉰 여섯편이 나온 상황이었다.
당시 애니메이션 업계는 팰릭스 더 캣을 비롯한 고양이 캐릭터가 득세 중이었는데 스튜디오는 고양이가 진부해진 틈을 타 슬쩍 토끼 캐릭터를 꺼내놓았다.
그 동안의 애니메이션의 코미디는 무분별한 슬랩스틱과 패러디로 비롯된 것이었고 월트는 여기서 캐릭터를 좀더 입체적으로 구성해보기로 결정한다.
바로 이 개성을 가진 캐릭터들에게서 최초의 퍼스낼리티 애니메이션들이 등장했고 오스왈드가 그 첫 번째 기수가 되었다.
미키 마우스
미키 마우스
이 수컷 쥐는 오스왈드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스튜디오에서 유일하게 월트의 편에 섰던 어브는 오스왈드의 귀를 줄이고 코를 통통하게 그린 캐릭터로, 아내 릴리언 디즈니의 의견으로 미키라는 이름을 짓게 되었고 이 캐릭터가 현재까지 월트 디즈니 컴퍼니를 대표하는 미키 마우스가 되었다.
이런 디자인은 시청자들에게 미키 마우스가 쉽게 인식되게 해주며 귀 모양은 미키 마우스의 비공식적인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월트는 시사회에서 오르간 반주를 깔아 상영했는데 그때의 관객들의 환호를 상기시키며 작품에 사운드를 도입해보기로 했다.
그 때 증기선 윌리를 본 적 있는 브로드웨이에 있는 콜로니 극장 주인이었던 해리 라이헨바흐란 남자가 월트에게 다가왔고 그 작품에게 매료된 그는 당시 애니메이션 가격으로는 유례없이 비싼 천불에 2주간의 상영권을 월트에게서 구입했다.
월트는 매일마다 극장에 와서 모든 상영을 지켜보며 극장 관객들의 반응을 체크했다.
컬러 애니메이션
월트는 이전까지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실감나는 만화를 만들고 싶었다.
당시 컬러 프린트의 상태들이 좋지 않아 눈을 심하게 자극하거나 물빠진 색만 보이는게 대다수인지라 실용화시키지는 못했지만 월트는 이미 유니버설에서 일하던 월터 랜츠가 최초로 사운드와 컬러를 입힌 애니메이션 '재즈가수'-일부분이 컬러다-을 보며 연구에 몰두했다.
그렇게 나온 애니메이션 '꽃과 나무'는 앞서 말한 삼색 인쇄법을 활용한 최초의 컬러 애니메이션이 되었다.
그 해 처음생긴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에서 첫 수상작이 되는 영광을 누린 것이다.
월트는 바로 그 부문에서 이해부터 8년 연속으로 상을 받게 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전성기는 1930~1940년대로 불리며, 1970년대 이후로는 버블경제를 뒤에 업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부흥으로 디즈니의 독주는 차차 깨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