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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마케터 2024. 4. 9.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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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여왕(영어: Alexandrina Victoria, 1819년 5월 24일 ~ 1901년 1월 22일)는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왕 (재위 : 1837년 6월 20일 ~ 1901년 1월 22일)이다.

본명은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Alexandrina Victoria)이고, 정식 칭호는 ‘HRH Alexandrina Victoria Hanover von Witten and Saxe-Coburg and Goetha, Dei Gratia Queen of All Britons, Defender Of The Faith, and Empress of India’이다.

하노버 왕가는 여성의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지 1세 때부터 계속된 영국과 하노버의 동군 연합 관계는 그녀의 즉위와 함께 끝났고,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의 왕위만 계승하여 64년간 재위하였다.

9명의 자녀들이 유럽의 여러 왕가 및 귀족 가문들과 혼인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유럽의 할머니'라고도 불린다.

빅토리아는 1819년 5월 24일 런던의 켄징턴 궁전에서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와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녀 빅토리아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연인 관계였던 아일랜드 출신의 존 코로이 밑에서 자라게 되었다.

사실 빅토리아는 원래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할아버지 조지 3세의 직계 혈통이 끊어지면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조지 3세는 15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조지 4세의 유일한 적통 샬럿 오거스타 공주가 1818년에 죽자, 그의 직계손 중에는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 없게 되어, 그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던 빅토리아가 추정 상속인이 되었고, 사실상 윌리엄 4세의 사후 즉위가 확실시 되었다.

왕실은 켄트 공작 부인의 연금을 두 배로 높이고 빅토리아의 양육비로 3만 파운드를 지급했다.빅토리아가 추정 상속인이 되자, 존 코로이는 빅토리아의 어머니와 합세해서 빅토리아를 친가 쪽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고립시키고,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어 장차 자신이 정치를 좌지우지하기 위해 온갖 술수를 부렸다.

빅토리아의 어머니 역시 빅토리아를 차기 왕으로 내세워 독일인이자 과부라는 이유로 위태로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두 사람의 왕위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빅토리아에게는 큰 부담감으로 다가왔고, 그로 인해 빅토리아는 점차 어머니한테서 멀어져 사사건건 충돌하며 갈등을 빚게 되었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도 결코 어머니를 용서하지 않았다.

빅토리아는 자신의 인형들에 이름을 붙이고 번호를 매겨 위치를 정해두어 하녀들이 임의로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1837년 빅토리아가 18살 생일을 맞은 뒤 26일 만에 셋째 백부인 윌리엄 4세가 서거하고 그의 뒤를 이어서 빅토리아는 즉위하였고, 하노버 왕가가 여성의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즉위와 동시에 조지 1세 때부터 계속된 영국과 하노버의 동군 연합 관계는 끝나게 되고, 그는 영국 왕위만을 계승하였다.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하울리가 빅토리아를 찾아가 차기 왕으로 내정됨을 알렸고, 빅토리아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성서를 펼친 뒤 “주님, 제가 영국의 왕이 되면 당신의 말씀대로 통치하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하였다고 한다.

즉위 후 빅토리아는 일단 버킹엄 궁전으로 들어가, 어머니를 자신의 거처에서 멀리 떨어진 방으로 쫓아내고 코로이도 연금을 주어 퇴직시켰다.

당시 영국은 프랑스와의 전쟁이 끝난 후 불어닥친 경제공황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빅토리아는 그런 민중들의 모습들을 보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

빅토리아 치세의 첫 번째 위기는 1839년에 두 차례 있었다.

둘 다 빅토리아의 정치적 당파심 때문에 생겨난 위기였다.

자유주의적인 휘그당을 열렬히 지원하던 빅토리아는 보수성격이 강한 토리당과 관련 있는 궁중 시녀 플로라 헤이스팅스에 대하여 늘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1833년 윌리엄 윌버포스 등의 국회의원들이 펼친 노예 제도 반대 운동의 결실인 노예 해방령을 거부한 자메이카는 영국의 자치령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배우자로 1순위에 오른 인물은 빅토리아의 외사촌이며 독일계 왕족인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앨버트 공작이었다.

그가 영국을 방문하기 위해 윈저 궁전에 도착한 지 불과 5일 뒤인 1839년 10월 15일, 빅토리아는 앨버트의 외모와 인품에 매혹되어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앨버트 공작은 빅토리아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훌륭한 정치적 조언자인 남편을 깊이 사랑하고 신뢰하였으며, 1861년 남편의 사망으로 큰 충격을 받아 국무에 손을 떼고 한동안 두문불출하기도 하였다.

빅토리아는 앨버트와의 사이에 4남 5녀를 두었으며 대부분의 자녀들이 유럽의 주요 왕족과 결혼하여 말년에는 '유럽의 할머니(the grandmother of Europe)'로 불렸다.

1861년 남편의 죽음으로 한동안 침울했던 빅토리아는 시종 존 브라운(John Brown)과 급속도로 친밀해진다.

빅토리아 여왕은 2차 보어 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1901년 1월 22일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작의 장남인 에드워드(에드워드 7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를 가속화하여 영토확장에 전력을 쏟았다.

빅토리아의 통치 기간 동안 영국의 영토는 세계 전체 대륙의 4분의 1을 확보하였고 4억명의 인구를 보유한 대제국이 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시기에 다음 지역들이 영국의 해외 영토가 되었고, 빅토리아는 식민제국의 군주로 군림하였다.

영국은 청나라와의 교역에서 무역 적자가 이루어지자 밀무역을 통하여 동인도 회사를 통해 다량의 아편을 지속적으로 중국에 유입시켰다.

청나라는 1729년 아편금지령을 실시했으나 이후 100여년간 아편은 대량으로 끊임없이 유입되어 백성들의 아편중독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1842년 난징조약을 체결하여 중국의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 전쟁의 결과 중국의 반식민지화가 가속되고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었다.

중국의 반식민지화

아편전쟁을 이끈 파머스턴이 수상이 되면서 빅토리아 시대의 대아시아 정책에 있어서 중국과 인도는 영국의 영토확장정책에 가장 중요한 거점국가가 되었다.

무굴 제국에 반대하는 인도 각 지역을 영국과 프랑스가 각각 지원하면서 대리전의 양상을 띠다가, 영국은 프랑스를 몰아내고 서서히 인도의 일부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정부는 동인도 회사를 통해 자국의 면직물에 대한 관세는 낮추고 인도산 면직물의 관세를 높이거나, 인도인들을 착취하였기 때문에 인도내에 반영감정이 고조되었다.

이 결과 1857년 세포이의 항쟁이 발생하였고, 영국은 이를 진압함과 동시에 무굴 제국의 바하두르 샤 2세를 퇴위시키고 제국을 멸망시켰다.

1877년 1월 1일부터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 국왕 뿐만 아니라 인도의 황제를 겸하였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19세기 후반부터 3C 정책을 추진하여 이집트의 카이로(Cairo),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Capetown), 인도의 캘커타(Calcutta)를 거점으로 하는 식민정책을 취하였다.

19세기 대영 제국이 번영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왕으로, 그녀가 정치를 하는 동안 영국은 사상 최고의 번영을 누렸다.

빅토리아는 입헌 군주로서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랐기 때문에 현실 정치에 미친 영향은 미미하였으나, 당시 영국 사회에 널리 퍼진 여왕의 화목한 가정에 대한 이미지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도덕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실례로 영국의 성공회 작가인 C.S.루이스가 쓴 《순전한 기독교》에서는 보수적인 성 문화를 빅토리아 시대의 성 문화에 빗대고 있다.

20세기 후반 내내 미국 문화가 무분별하게 범람했던 것을 정화하는 차원에서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 문화가 새로운 대안으로 거론될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녀는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은 군주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녀의 이름은 런던에 있는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 짐바브웨와 잠비아 사이의 빅토리아 폭포를 비롯한 영국과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의 지명과 건축물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1819년 5월 24일 ~ 1837년 6월 20일 : 켄트 공녀 빅토리아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Alexandrina Victoria of Kent)

빅토리아 여왕은 혈우병 보인자였는데, 혈우병은 출혈시 혈액을 응고시켜주는 혈소판의 혈액응고인자가 부족하여, 한번 다쳤을 경우 피가 잘 멎지 않는 병이기 때문에 비교적 약한 타격으로도 출혈이 발생할 경우 생명이 위태로운 병이다.

빅토리아 여왕의 9명의 자녀중, 둘째 딸인 앨리스 공주와, 넷째 아들인 레오폴드 공작, 막내 딸인 베아트리스 공주가 혈우병 보인자로 태어났다.

빅토리아의 둘째 딸인 앨리스 공주는 혈우병 보인자로 태어났는데, 그녀의 넷째 딸인 알렉산드라 역시 외할머니 빅토리아와 어머니로 앨리스 공주로부터 혈우병 보인자로 태어났다.

알렉산드라는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와 결혼하여 러시아의 황후가 되었다.

이후 알렉산드라 황후는 1남 4녀를 낳았는데, 그 중 넷째 딸인 아나스타샤 공주와 외아들 알렉세이 황태자에게서 혈우병이 발현하였고, 남성인 알렉세이만 혈우병을 앓게 되었다.

빅토리아의 넷째 아들인 레오폴드 공작 역시 혈우병을 앓았는데, 남성이었기 때문에 보인자임과 동시에 본인 스스로도 혈우병으로 인해 서른 살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빅토리아의 막내 딸인 베아트리스 공주 역시 혈우병 보인자로 태어났다.

베아트리스 공주는 3남 1녀를 낳았는데 이중 장녀인 빅토리아 유제니 공주와 차남 레오폴드, 삼남 모리스가 베아트리스 공주로부터 혈우병을 물려받았다.

장녀 빅토리아 유제니는 스페인의 알폰소 13세와 결혼하였는데, 그녀의 장남 알폰소와 막내 아들 곤살로에게 혈우병이 유전되었고, 곤살로는 1934년 누나와 함께 비교적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하였는데 곤살로 본인만 복부의 내출혈로 인해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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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빅토리아 - 파인드 어 그레이브

(영어) 빅토리아 - 영국 국가기록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