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 향남이끄시는교회#
- wifi
- 파이썬#전역변수#루프탈출
- 향남교회#
- 윤동주눈감고간다#윤동주#맥스글로벌마케팅
- 윤동주양지쪽#윤동주#양지쪽#맥스글로벌마케팅
- maxglobalmarketing
- 향남이끄시는교회
- 마케팅도구
- 시인윤동주
- 향남이끄시는교회#김상웅목사#향남교회#발안교회
- 파이썬 jpg를 jpeg로
- 2023년종합소득세
- Today
- Total
맥스글로벌마케팅★MGM★Max Global Marketing
▣오늘의 인물▣ 본문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그리스어: Κλεοπάτρα Φιλοπάτωρ, 영어: Cleopatra VII Philopator, 기원전 69년 - 기원전 30년 8월 10일, 재위: 기원전 51년 ~ 기원전 30년)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여왕이자 마지막 통치자였다.
이집트는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이후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었으며, 이는 제2의 마지막 헬레니즘 국가와 알렉산드로스 3세의 통치 (기원전 336년~323년) 이후 지속된 시대의 종말을 의미한다.
클레오파트라의 모국어는 코이네 그리스어였으며 이집트어를 배운 유일한 프톨레마이오스 군주였다.기원전 58년,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는 당시 로마의 종속국이던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경쟁자인 딸 베레니케 4세가 왕위 주장을 하게 된 후 로마로 추방되었는데, 클레오파트라도 이때 동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51년 그가 죽자 클레오파트라와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의 공동 통치가 시작되었지만 둘 사이의 갈등으로 내전이 벌어졌다.
기원전 48년 카이사르의 내전 중 그리스에서 벌어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경쟁자 율리우스 카이사르(로마 독재관이자 집정관)에게 패한 로마 정치가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피했다.
그런 다음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남매를 화해시키려고 했지만 카이사르의 조건이 클레오파트라에게 편향적이라고 판단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수석 고문인 포테이노스는 군대를 동원해 궁전에 있는 클레오파트라와와 카이사르를 포위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기원전 47년 나일강 전투에서 카이사르의 지원군이 포위를 돌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클레오파트라의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공동 통치자로 선언했지만 아들 카이사리온을 낳은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적인 관계는 유지했다.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46년과 44년에 로마에 방문했고, 그 때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별장에 머물렀다.
기원전 44년 (클레오파트라의 명령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암살되고 카이사르도 암살된 후,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을 프톨레마이오스 15세로서 공동 통치자로 지명했다.
기원전 43~42년 리베라토레스의 내전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조카이자 상속자인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결성한 로마 제2차 삼두정치의 편에 섰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와 기원전 41년 타르수스에서 만난 후로 관계를 가졌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요청으로 아르시노에를 처형했으며, 파르티아 제국과 아르메니아 왕국을 침공하는 동안 자금과 군사적 지원 모두를 클레오파트라에게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봉헌식에서는 그들의 자녀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를 안토니우스가 삼두정으로서 가지고 있는 여러 지역의 왕으로 선언하였다.
옥타비아누스도 선전전에 가담했으며, 기원전 32년에 로마 원로원에서 안토니우스의 동맹국들을 로마에서 퇴출시키고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했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를 격파한 옥타비아누스의 군대는 기원전 30년에 이집트를 침공하여 안토니우스를 격파했고 안토니우스는 자살하였다.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을 로마의 개선 행렬에 데려가려 했다는 사실을 알자 독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고대 그리스어로 영광을 뜻하는 '클레오스(고대 그리스어: κλέος)'와 아버지를 뜻하는 '파테르(고대 그리스어: πατήρ)'가 합해 만들어진 것으로, '아버지의 영광'(고대 그리스어: Κλεοπάτρα)'을 의미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누이와 더불어 그리스 신화에서 멜레아그로스의 아내인 클레오파트라 알키오네의 이름이기도 하다.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와 클레오파트라 1세 시라 (셀레우코스 왕조의 공주) 간의 결혼을 통해,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도 들어서게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파라오는 멤피스에서 프타의 최고 제사장으로부터 왕관을 받으며 대관식을 치른 뒤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세운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머무르며 집무를 보았다.
클레오파트라는 다른 파라오들과는 달리 성인이 되어서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집트어를 배운 최초의 프톨레마이오스 파라오가 되었다.
동시대 로마인들은 클레오파트라와 대화할 때 그녀의 모국어인 코이네 그리스어를 쓰려고 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라틴어도 말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어, 이집트어, 라틴어 외의 언어들은 한때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에 속했던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 영토를 수복하려는 클레오파트라의 열망을 반영하는 것이다.로마는 클레오파트라 즉위 이전부터 이집트에 간섭해왔다.
기원전 81년 말 프톨레마이오스 9세 라티로스가 죽자 그의 딸 베레니케 3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왕실에서 여성의 단독 통치에 대한 반대가 커지자 베레니케 3세는 로마의 독재관 술라가 제시한 방책인 사촌이자 의붓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11세 알렉산드르 2세와의 결혼 및 공동 통치를 받아들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1세는 결혼하고서 얼마 지나지 않은 기원전 80년에 아내를 암살했으나 이로 인한 폭동이 일어나게 되고, 그는 피살당한다.
로마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암살되자 종속국 이집트를 합병할 법적 근거를 가지게 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69년에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의 딸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클레오파트라의 언니인 베레니케 4세 에피파네이아의 생모이자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부인이었던 클레오파트라 5세 트뤼파이나로 여겨진다.
클레오파트라의 동생으로는 여동생 아르시노에 4세와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테오스 필로파테르, 프톨레마이오스 14세 필로파토르가 있다.
기원전 65년에 로마 공화국의 감찰관이었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공화국의 원로원 앞에 나아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하는 이집트를 합병시켜야 한다고 청원서를 제출하였으나 거절되고, 기원전 63년에는 트리부누스였던 세르빌리우스 룰루스가 유사한 청원을 올렸으나 마찬가지로 거절된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이러한 합병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로마의 유력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바치는데, 이중에는 미트리다테스 6세 메가스를 정벌중인 폼페이우스가 있었으며, 기원전 59년에는 집정관에 오른 카이사르에게도 뇌물을 바친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낭비벽으로 인해 결국 파산에 이르고, 결국 로마의 은행가 가이우스 라비리우스 포스투무스에게 빚을 지게 되고야 만다.
기원전 58년에 로마는 키프로스를 합병하고,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형제였던 키프로스의 프톨레마이오스는 해적질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파포스로 추방되는 대신 자살을 선택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형제의 죽음에 대해 공식적으로 어떠한 성명도 내지 않는데, 비록 로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결정이었지만 그의 경제 정책에 이미 분노해있던 백성들의 심기를 더더욱 건드리는 꼴이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이후 이집트에서 강제로 추방당해 처음에는 로도스섬으로, 그다음엔 아테네로, 종국에는 이탈리아 프라에네스테에 있는 폼페이우스의 빌라에서 살게 된다.
클레오파트라 역시 표면상으로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와 함께 로마 변두리의 빌라에서 같이 생활한다.
대신 이집트를 통치하게 된 클레오파트라의 언니 베레니케 4세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복귀하지 않고 자신이 계속 통치하도록 해달라는 취지의 사절을 로마에 보내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로마의 고위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사절단의 주요 인물들을 암살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원로원에게 자신이 이집트로 돌아갈 때 무장한 호위병력들을 지원해줄 것을 요구하나 거부되자, 기원전 57년 말에 이집트 대신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으로 가 거기 머무른다.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재정을 관리하던 로마인들은 그를 복권시키는데 힘을 보태기로 결정한다.
폼페이우스는 시리아 총독이던 아울루스 가비니우스로 하여금 이집트를 공격하여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복권시키자고 설득하고, 1만 달란트를 원조한다.
당시 젊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가비니우스의 지휘 하에 기병대 장교로 복무중이었는데, 펠루시움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민간인 학살을 저지르려던 것을 막고 베레니케 4세의 남편인 아르켈라오스의 시신을 명예롭게 매장될 수 있게 해준 것으로 이름을 떨쳤다.
당시 14살이었던 클레오파트라는 당시 로마의 원정군들과 함께 움직였는데 후에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사랑에 빠진 것이 이 때였노라고 말한다.
그러나 뇌물 수수에 대해서는 유죄 판결을 받고 추방당하지만, 그로부터 7년 후 기원전 48년에 카이사르에 의해 복직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자신의 왕위를 찬탈한 베레니케 4세와 그녀의 지원자들을 처형하고 가산을 몰수한다.
비록 이런 문제들이 있긴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자신의 권력을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이양할 뜻을 밝히고, 에드푸 신전, 덴데라 신전 등의 공공건설사업 등을 펼치며 경제를 안정화시킨다.
기원전 52년 5월 31일,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클레오파트라에게 대리청정을 맡긴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죽고, 기원전 51년 3월 22일 클레오파트라는 테베 근처 헤르몬티스에 몬수 황소신상을 설치하는 자리에 참석하는 것으로 여왕의 직무를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1,750만 드라크마에 달하는 빚을 로마 공화국에 남기고 갔다.기원전 50년 시리아 속주의 프로콘술인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는 가비니우스가 남기고 간 로마군들을 로마-파르티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장남과 차남을 이집트로 보낸다.
클레오파트라는 두 아들을 살해한 범인들을 비불루스가 직접 처분할 수 있도록 호송해 보내지만, 비불루스는 재판권은 로마 원로원에게만 있다며 클레오파트라를 문책하고 이들을 돌려보낸다.
기원전 51년 8월 29일부터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단독 군주로 등장하는데, 이는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클레오파트라에게 밀려 공동 통치자가 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클레오파트라는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잠깐 동안 동맹을 형성했지만 기원전 50년 가을부터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클레오파트라보다 앞에 서명하는 등 클레오파트라는 점점 밀려나기 시작한다.
기원전 49년에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기준으로 한 기년법이 부여된다.
기원전 49년 여름, 폼페이우스의 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아버지의 명을 받고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러 도착했을 때 클레오파트라의 군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여전히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 맞서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마지못해 공동성명으로 이를 재가하며 60척의 배와 가비니우스가 두고 간 로마군들을 포함해 500명의 병력을 보냈는데, 이로써 로마에 진 빚의 일부를 변제할 수 있었다.
기원전 48년 봄이 되기 전, 클레오파트라는 그녀의 여동생 아르시노에 4세와 함께 이집트로 향할 침략군을 모으기 위해 시리아 속주로 향한다.
그녀는 지원군을 이끌고 돌아왔지만, 로마 주둔군까지 동원한 남동생의 군대에 의해 진격하지 못하고 나일강 삼각주 동부에 있는 펠루시움 외곽에 주둔한다.한편 기원전 48년 8월 9일 그리스에서는 카이사르가 파르살루스에서의 전투 끝에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섬멸하고 폼페이우스는 레바논의 티레로 후퇴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자신이 내전을 종식시켰다고 생각하여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방부처리한 뒤 10월 초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해 왕궁에 거주하던 카이사르에게 보낸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죽음에 슬퍼하며 분노하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클레오파트라에게 서로 화해하고 군대를 해산할 것을 요구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군대를 해산하고 들어오라는 카이사르의 요구를 보란듯이 무시하고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한다.
플루타르코스는 클레오파트라가 궁전으로 은밀하게 들어가기 위해 침대 자루 안에 묶여 있었다고 기록한다.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누나가 카이사르와 함께 궁전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알렉산드리아의 군중을 선동하여 소요를 일으키려 했지만, 웅변으로 군중을 진정시킨 카이사르에게 체포되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알렉산드리아의 시민 회의 앞에 데리고 온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나머지 남매 아르시오네 4세와 프톨레마이오스 14세로 하여금 키프로스를 공동 통치하도록 하여, 기원전 58년 로마에게 키프로스를 빼앗긴 이집트를 달랜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이 프톨레마이오스 13세보다 클레오파트라에 편향된 것이라고 판단한 포테이노스는 아킬라스로 하여금 2만의 군대를 이끌고 알렉산드리아로 진군하게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아르시노에 4세는 군대를 나일강까지 철수시키나 거기서 카이사르에게 공격을 당해 섬멸당한다.
이 때 카이사르는 휘하 장교 안토니우스의 도움으로 독재관에 오르는데, 이로서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분쟁을 해결할 법적 권한을 갖게 된다.
과거 클레오파트라의 언니 베레니케 4세가 단독 여성 군주로 부임했던 것을 실수였다고 생각한 카이사르는 당시 22살의 클레오파트라와 12살 된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한다.
키프로스도 기원전 42년 이전에 클레오파트라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다.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경에 이집트를 떠나 아나톨리아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던 폰토스 왕국의 파르나케스 2세와 대치했다고 전해진다.
카이사르는 본처 칼푸르니아가 아직 자식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클레오파트라가 아들을 낳았을 때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해석한다.
카이사르는 나중에 노예출신인 루피오의 휘하에 4개 군단을 맡긴 뒤 이집트에 주둔시키는데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입지를 굳힘과 동시에 그녀의 활동을 감시 및 억압하기 위한 용도였던 것으로 파악된다.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47년 6월 23일에 카이사리온을 낳고, "카이사르 파라오"라는 칭호를 부여한다.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명목상 공동 통치자 프톨레마이오스 14세는 기원전 46년 말 로마를 방문하는데, 카이사리온은 동행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카이사르는 그들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와 마찬가지로,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4세 모두에게 "로마인의 친구이자 동맹(라틴어: socius et amicus populi Romani)"이라는 법적 지위를 부여했는데, 로마에 충성을 맹세한 종속국의 군주에게 부여하는 호칭이었다.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의 별장에 머물 때 그녀를 방문한 사람들 중에는 원로 키케로도 있었는데, 그는 후에 클레오파트라가 거만했다고 말한다.
클레오파트라의 신하인 알렉산드리아의 소시게네스는 카이사르를 도와 기원전 45년 1월 1일 시행될 새로운 율리우스력을 제작했다.
기원전 46년 9월 25일 카이사르의 포럼에 세워진 비너스 신전에는 3세기까지 클레오파트라의 황금 조각상이 있었는데, 로마인의 어머니인 비너스 여신과 카이사르의 아이의 어머니로 비정되는 클레오파트라를 동일시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 축제에서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머리에 다이아뎀을 씌우려 했지만, 카이사르는 대중이 헬레니즘식 전제정에 부담을 느끼는 것을 감지하고는 이를 거절한다.
카이사르는 3월 15일에 암살되었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인정받기를 바라는 헛된 희망으로 4월 중순까지 로마에 머물렀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유언장으로 누나의 손자 옥타비아누스를 1차 상속인으로 지명했고, 클레오파트라는 이제 이집트로 떠나기로 결심한 비슷한 시기에 이탈리아에 도착한다.
몇 달 후,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독살함으로써 그녀의 아들 카이사리온을 그녀의 공동 통치자로 격상시켰다.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기원전 43년에 카이사르의 암살에 정의의 심판을 내리라는 명목으로 선출되어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한다.
클레오파트라가 키프로스의 총독으로 임명한 세라피온이 카시우스에게 망명하여 선박을 제공하는 동안,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를 지원하기 위해 자신의 선단을 그리스로 데려간다.
기원전 41년 여름, 안토니우스는 아나톨리아의 타르수스에 사령부를 설립하고 클레오파트라를 초청하는 서신을 여러 편 보냈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안토니우스의 사절 퀸투스 델리우스의 언변에 넘어가 안토니우스를 만나러 간다.
클레오파트라는 내전 동안 카시우스를 지원했다는 오해를 풀고 레반트의 영토 교환을 목적으로 회담에 참석하지만, 안토니우스는 사랑에 빠져 개인적인 교제를 목적으로 클레오파트라에게 접근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시우스가 아닌 돌라벨라를 도우려 노력했다고 결백을 호소했고, 자신의 추방된 여동생 아르시노에 4세를 에페소스에서 처형해달라고 안토니우스를 설득했다.
클레오파트라는 타르수스에서 출발하기 전에 안토니우스를 이집트로 초대했고,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41년 11월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한다.
알렉산드리아의 민중은 안토니우스가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복권시키는 과정에서 보여준 영웅적인 행동과 더불어, 카이사르와 다르게 군대를 데리고 오지 않은 점에 대해 호감을 가진다.
이집트에 도착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배에서 볼 수 있었던 호화로운 왕실 생활을 즐기기 시작한다.
그는 또한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와 같은 부하들로 하여금 아나톨리아와 시리아에서 파르티아인들을 몰아내도록 지시하였다.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카이사르의 사후 가장 강력한 인물이라고 생각한 까닭에, 후계자를 낳을 자신의 남편감으로 선택했다.
안토니우스는 삼두 중 하나로서 현재 로마의 손에 있는 과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영토를 클레오파트라에게 다시 돌려줄 수 있는 권한 역시 가지고 있었다.
기원전 38년 11월 19일에 킬리키아와 키프로스가 클레오파트라의 영토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와 함께 지내던 기원전 41-40년 겨울에 양도된 것으로 본다.기원전 40년 봄, 파르티아 제국에서 망명한 로마 장교 퀸투스 라비에누스가 시리아를 공격해 총독 루키우스 데키디우스 삭사가 전사하고 군대가 사로잡히는 사건이 발생한다.
안토니우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집트를 떠나는데, 클레오파트라는 회복한 영토에 대한 보답으로 안토니우스에게 200척의 선박을 지원한다.
기원전 40년 말, 클레오파트라는 쌍둥이를 낳는다.
이 때 태어난 아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모두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친자로 인정한다.
태양을 의미하는 헬리오스와 달을 의미하는 셀레네는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를 정복함으로써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위업을 재현할 것이라는 클레오파트라의 기대뿐만 아니라 새 기운이 흐르는 사회의 상징이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기원전 40년 9월 이탈리아 브룬디시움에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평화협정으로 이어졌다.
이 협정에서 로마 공화정의 동쪽 이오니아해에 대한 안토니우스의 지배력이 공고히 승인되었지만, 동시에 안토니우스는 이탈리아, 히스파니아, 갈리아에 대한 옥타비아누스의 지배를 인정하고 그의 여동생과 결혼함으로써 클레오파트라에게 경쟁자가 생긴다.
기원전 40년 12월 클레오파트라는 예상치 못한 손님인 헤로데를 맞이한다.
클레오파트라의 정적이었던 헤로데는 로마의 강력한 군사 지원 끝에 유대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제 세 살 된 쌍둥이를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는데, 헬리오스와 셀레네라는 이름은 이 때 안토니우스가 지어준 것으로 본다.
이는 단순히 동쪽을 안정시키는 것을 넘어, 클레오파트라의 왕국과 함께 여러 속국들을 아래에 둔 새로운 제국의 설립이라는 야심을 공유한 것에 대한 증거로 본다.이 회담에서 클레오파트라는 티레와 시돈을 제외한 레반트 지역에 있던 과거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영토를 거의 다 복구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의 직접 지배 영토를 내어주면서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을 확장시킨 점을 이용해 안토니우스를 공격한다.
이들의 동상은 옥타비아와 리비아의 동상은 카이사르의 포럼에 세워진 클레오파트라의 동상 곁에 세워졌다.기원전 36년,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제국 정벌에 유프라테스강까지 동행한다.
기원전 36년 여름, 안토니우스와의 둘째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가 태어난다.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정벌은 동맹군이었던 대아르메니아 왕국의 아르타바스데스 2세의 배신으로 완전히 실패한다.
그러던 중 클로에파트라는 물질적 지원을 위해 안토니우스를 방문하고, 안토니우스는 위험을 감내하면서 로마로 돌아가는 대신 자신의 아들을 보기 위해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알렉산드리아로 향한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5년에 또 다른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하는데, 이번에는 파르티아 제국의 아르메니아를 목표로 한다.
옥타비아는 2,000명의 병력을 데리고 아테네로 가는데, 안토니우스를 지원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저번 파르티아 정벌의 참패를 조롱하기 위해 옥타비아누스가 파견한 것으로 본다.
안토니우스는 이 병력을 받고 옥타비아에게 자신과 클레오파트라가 안티오키아로 갈테니 아테네에서 동쪽으로 오지 말 것을 당부하지만, 갑작스럽게 원정을 포기하고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간다.
옥타비아가 로마로 돌아왔을 때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누이가 안토니우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에 분노하지만, 옥타비아는 안토니우스의 집을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무른다.
당시 옥타비아누스는 시칠리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반란을 일으킨 죄로 가택연금에 처해진 나머지 삼두 레피두스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등 서방의 경쟁자들을 물리쳐 자신의 군사력에 대해 강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델리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아르메니아 왕의 딸의 정략 결혼을 위해 기원전 34년 아르타바스데스 2세에게 향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선전을 위해 이것을 대중에게 공개하고자 했지만,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던 두 집정관에 의해 검열되었다.기원전 34년 후반에, 향후 수년간 이어질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선전전이 시작된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레피두스를 불법으로 삼두에서 물러나게 하고 권리를 제한했다고 주장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아르메니아 왕을 불법 억류하고, 여동생 옥타비아와 부부관계임에도 불구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했으며, 카이사르의 유언장과 달리 옥타비아누스 대신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후계자라 주장한 점을 비난했다.
옥타비아누스의 선전물 속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세뇌시키는 마녀에서부터, 문명을 파괴하는 데 있어 호메로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트로이의 헬레네만큼이나 위험한 존재가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집정관 임기가 시작되는 날인 기원전 33년 1월 1일 원로원 연설에서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의 노예로서 로마의 자유와 영토 보전을 전복하려 한다고 비난한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이두정이 기원전 33년 12월 31일 만료되기 전에,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입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진정한 후계자로 선언한다.
이러한 행위에 두려움을 느낀 안토니우스파 집정관들과 200명 이상의 원로들은 다음날 로마를 떠나 안토니우스에게로 간다.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2년에 에페수스로 향하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에게 제공할 수 있는 800척의 함정 중 200척을 제공한다.
옥타비아누스의 선전 내용을 의식한 아헤노바르부스는 안토니우스를 설득하여 옥타비아누스 정벌에 클레오파트라를 제외시키려 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의 부관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전쟁에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군주로서의 능력도 뛰어나다며 아헤노바르부스의 의견에 반대한다.
안토니우스는 아헤노바르부스의 의견에 따라 클레오파트라에게 돌아갈 것을 요청하나,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를 방어하려면 그리스에서 옥타비아누스를 막는 편이 더 낫다며 요청을 거절한다.
기원전 32년 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아테네로 향하는데, 여기서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로 하여금 옥타비아에게 공식적인 이혼 선언서를 보내라고 설득한다.
신성한 법적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감수하고서 옥타비아누스는 베스타 신전에서 강제로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확보하는데, 이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상대로 한 선전전에서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유언에서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명하고, 알렉산드리아 봉헌에서의 선언을 확증하고, 클레오파트라와 나란히 알렉산드리아에 묻히길 원하고, 로마 공화국의 새로운 수도로 알렉산드리아를 삼을 것이라는 내용을 발견해 선전에 활용한다.
안토니우스의 유언을 공론화함으로써 전쟁 명분을 확보한 옥타비아누스는 이제 안토니우스가 아닌 클레오파트라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전쟁에 대한 법적 명분은 클레오파트라의 영토 획득에 바탕을 둔 것이었는데, 안토니우스의 삼두정치가 만료되었기 때문에 클레오파트라는 이제 민간인에게 군사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는 옥타비아누스보다 거대했지만, 병력들은 잘 훈련되지 않은데다가 일부는 상선의 선원들을 징발한 것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아드리아해를 건너 타렌툼이나 브룬디시움에서 옥타비아누스를 봉쇄하고자 했지만, 이집트 방어가 주목적인 클레오파트라는 이탈리아를 직접 공격하자는 안토니우스의 결정을 무시한다.
기원전 32년 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의 파트라이에 사령부를 세워 겨울을 보낸 뒤 이듬해 봄에 암브라키코스만 남쪽의 악티움으로 사령부를 옮긴다.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동맹국을 여럿 가지고 있었지만, 이미 클레오파트라와 갈등을 겪었던 헤로데는 유다에서 지진이 일어나자 지원군을 물린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1년 여름 악티움 주변에서 옥타비아누스와의 교전에서 몇 차례 패배한데 이어 안토니우스의 오랜 동료 델리우스, 갈라티아왕 아민타스, 파플라고니아의 데이오타로스 등이 옥타비아누스의 진영으로 망명한다.
결국 안토니우스의 진영에서 해전을 포기하고 내륙으로 후퇴하자는 의견까지 나왔지만,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를 이집트에서 멀리 떨어뜨리는게 목적이었던 클레오파트라는 해전을 계속 이어간다.
기원전 31년 9월 2일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이끄는 옥타비아누스 해군은 악티움 전투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와 대치한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녀의 주력함인 안토니아스 호를 타고, 함대의 후방에 있는 암브라키코스만 입구에서 60척의 배를 지휘했는데, 안토니우스의 장교들이 전투에서 그녀를 소외시키기 위해 후방에 배치한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안토니우스는 추격이나 후퇴에서 추진력을 얻기 위해 배에 돛을 달라고 명령한 적이 있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이 추진력을 이용해 펠로폰네소스반도로 재빨리 철수하곤 했다.
로마의 작가들은 이를 두고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를 버리고 비겁하게 도망쳤다고 적지만, 클레오파트라 군이 후퇴한 것은 적군의 봉쇄를 깨트리고 함대를 최대한 인양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따라 그녀의 배에 옮겨탔는데, 안토니아스 호는 티리언 퍼플로 염색된 까닭에 쉽게 식별되어 두 사람은 전투를 피해 타이나론으로 후퇴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타이나론에 도착해 클레오파트라의 몸종들이 안토니우스에게 클레오파트라와 대화를 하라고 하기 전까지 클레오파트라와 대화하지 않았다고 한다.
옥타비아누스가 아테네를 점령하는 동안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파라이토니온에 상륙한다.
그 후 안토니우스는 키레네로 가서 증원군을 모집한 반면,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 항구로 가서 그리스에서 마치 승리를 거둔 것처럼 거짓말을 한다.
이 때 클레오파트라는 과거 아르메니아에서 사로잡아온 아르타바스데스 2세를 처형하고 그 목을 아트로파테네의 아르타바스데스 1세에게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안토니우스에 의해 임명된 키레네 총독 루키우스 피나리우스는 안토니우스의 사절단이 총독부에 도착하기 전에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사절단을 처형하여 옥타비아누스의 곁으로 망명하는데 안토니우스가 얻고자 했던 자신 휘하의 4개 군단을 모두 데리고 갔다.
악티움 전투 이후 안토니우스에게 클레오파트라를 배신해야 한다고 충고했던 헤로데는 옥타비아누스를 만나기 위해 로도스로 갔고 안토니우스에게서 받은 왕위를 내려놓는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헤로데의 말과 충성심에서 깊은 인상을 받아 유대에서 왕위를 계속 유지하도록 했다.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1년 늦여름부터는 안토니우스를 카이사리온에 대한 방해물로 여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말리쿠스 1세가 옥타비아누스 편인 시리아 총독인 퀸투스 디디우스의 조언대로 클레오파트라의 선단을 불태워 나바테아의 영토를 빼앗긴 것에 대한 해묵은 복수를 자행한 까닭에 클레오파트라는 떠나지 못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아들 카이사리온을 신전의 입단식을 통해 시민권을 획득하기 전 청년으로서의 의무가 부여되는 에페보스로 등록하는데, 콥토스에서 발견된 비석에 의하면 기원전 31년경에는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을 이집트의 유일한 통치자가 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즈음 계속 로도스에 머물고 있던 옥타비아누스에게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각각 사절을 통해 편지를 보냈는데, 클레오파트라만 답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이집트를 상속하는 것을 허락할 것과, 안토니우스의 생존을 요구하며 상당한 선물을 보냈는데 만일 소원을 들어준다면 향후 더 많은 재화를 보낼 것을 약속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부하인 티르소스를 클레오파트라에게 보내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무덤 속에서 보물과 함께 분신자살하겠다며 협박한다.
티르소스는 살고싶다면 안토니우스를 죽이라고 조언하지만,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안토니우스에 의해 곤장을 맞고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한 채로 옥타비아누스에게 돌아간다.지리한 협상 끝에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0년 봄, 이집트를 침공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측근들과 함께 무덤에 숨는데 이 때 안토니우스에게 목숨을 끊었다는 전서를 보낸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숨이 붙은 채로 클레오파트라가 있는 무덤으로 가서 클레오파트라에게 자신이 명예롭게 숨을 거두었고, 옥타비아누스의 동료중 가이우스 프로쿨레이우스는 믿을만한 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바로 그 프로쿨레이우스가 사다리를 타고 무덤에 잠입하여 클레오파트라를 사로잡고, 클레오파트라에게 보화와 함께 불타죽을 용기조차 없다고 비아냥댔다.
이렇게 붙잡힌 클레오파트라는 호송되기 전에 안토니우스를 자신과 함께 이집트의 전통 장례법에 따라 안장할 수 있도록 부탁하여 허가받는다.옥타비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에 들어가 왕궁을 점령하고 클레오파트라의 세 자녀들을 사로잡는다.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0년 8월 10일 39세의 나이로 자신의 무덤에서 목숨을 끊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비록 옥타비아누스는 이 사실에 분개했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 옆에 왕의 위엄을 갖춘 채로 매장되었다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5세로 등극한 카이사리온은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을 왕으로 인정해주리라는 헛소문에 속아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 18일째 되는 날인 8월 29일 옥타비아누스의 명령에 의해 처형당한다.
기원전 27년 1월,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로 개명하고 세력을 축적하여 초대 로마 황제로 제국의 시대를 연다.
옥타비아누스의 이집트 정복 이후 살아남은 클레오파트라 7세의 자녀는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의 2남 1녀였다.
클레오파트라 7세 사후 이들은 로마에 있는 안토니우스의 전처 소 옥타비아에게 맡겨진다.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와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는 기원전 29년 옥타비아누스의 개선식에 참석한다.
이후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의 이야기는 알려진 바가 없다.
셀레네 2세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학자, 예술가, 정치고문들을 섭외하여 카이사레아에서 헬레니즘 그리스 문화를 꽃피운다.
셀레네 2세는 아들의 이름을 프톨레마이오스로 지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계승의식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셀레네 2세는 기원전 5년경, 유바 2세는 기원후 23/24년에 사망하고 아들 프톨레마이오스가 그 뒤를 잇는다.
군인 황제 시대에 팔미라 제국의 여황 제노비아가 클레오파트라의 후손을 자처하긴 했지만, 마우레타니아의 프톨레마이오스의 처형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출신의 마지막 군주가 사라진 것이다.
때때로 경제가 어려우면 주화의 질이 낮아지기도 했는데, 이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 금화를 발행했던 것과는 다르게 클레오파트라 때에는 은화와 동화만 발행하였다.
로마 당대의 역사학 문헌 중 클레오파트라를 언급하는 문헌은 약 50건에 달하나, 이들 대부분이 악티움 해전, 클레오파트라의 자살, 클레오파트라가 로마를 짓밟은 불순한 여인이라는 아우구스투스의 프로파간다를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플루타르코스는 클레오파트라 사후 1세기 후의 인물이지만, 클레오파트라의 어의로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서가에 드나들었던 올림포스, 암피사의 필로타스, 퀸투스 델리우스 등이 남긴 다양한 1차 자료들을 참고하여 글을 썼다.
이외에도 프톨레마이오스의 화폐, 파피루스 문서, 부조 등에서 클레오파트라 및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관점을 알 수 있으나 로마의 기록에 비하면 그 양이 미미하다.
이외에도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의 남편인 유바 2세의 지원 아래 작성된 《리뷔카》에서도 클레오파트라를 옹호하는 관점을 볼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로 클레오파트라는 대중 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클레오파트라를 대상으로 하는 문학, 공연, 미술 등의 작품은 그 이전 고전 고대와 비교할 때 그 양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대중의 클레오파트라 인식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초서의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유혹하는 여인의 면모가 부각되어 있는데, 이는 마찬가지로 14세기 이탈리아의 시인 조반니 보카치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를 모델로 삼은 예술작품은 이집트 뿐 아니라 고대 지중해를 둘러싼 세계 전체에서 만들어졌다.
특히 카메오는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를 헬레니즘 양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현재 알테스 박물관에서 소장중이다.
이집트 바깥에서 만들어진 대표적인 조소로는 로마의 비너스 게네트릭스 신전에 전시되었던 클레오파트라의 금도금 동상이 있다.
플루타르코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안토니우스의 입상은 파괴했지만 클레오파트라의 것을 파괴하지 않은 까닭은, 그녀의 친구 아르키비우스가 아우구스투스에게 2,000 달란트를 바치며 보존을 부탁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였다.1950년대부터는 에스퀼리노 언덕에서 1874년에 발굴되어 카피톨리니 미술관에서 전시중인 에스퀼리노 비너스상이 클레오파트라를 모델로 한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두 작품 모두 왕가의 다이아뎀을 쓰고 있으며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데, 아마도 당대 로마의 비너스 게네트릭스 신전에 있던 동상에 묘사된 클레오파트라를 조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둘 모두 기원전 1세기 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아피아 가도의 퀸틸리우스 형제 저택 유적에서 발굴된 것이다.
이 역시 베를린과 바티칸 소장품과 비슷한 외모로 조각되었으며 다이아뎀을 착용하고 있는데, 헤어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의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로마의 이시스 신전 근처에서 발견된 것으로, 기원전 1세기경에 제작되었다.
특이하게도 신전의 열린 문 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모습으로 묘사되었는데, 학자들은 이를 두고 당시 로마에 실제로 존재했던 비너스 게네트릭스 신전의 열린 문 틈 사이로 보이던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의 상을 묘사한 것으로 본다.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케도니아 그리스 왕조에 속한다.
아버지가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이기에, 클레오파트라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의 두 유명한 동료인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창시자인 장군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와 서아시아의 셀레우코스 제국 창시자인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의 후손이다.
클레오파트라 5세는 이전에 딸 베레니케 4세를 낳은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누이이자 아내이다.클레오파트라 1세 쉬라는 유일하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비(非)그리스 혈통을 포함시킨 것으로 알려진 구성원이다.
일반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토착 이집트인과는 혼인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롤러는 클레오파트라가 이론상으로 반은 마케도니아 그리스계이고 반은 북이집트 멤피스의 프타의 사제 가문에 속한 이집트 여성의 혈통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한다.(일반적으로 이 가설은 학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녀의 조상이 누구이든,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계 프톨레마이오스의 유산을 가장 중요히 여겼다.
스트라보는 클레오파트라를 비롯한 베레니케 4세 이후에 태어난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자녀들이 친생자라고 주장한 유일한 고대 역사가였다.
클레오파트라 5세(또는 6세)는 클레오파트라가 태어난 지 몇 달 후인 기원전 69년 말에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왕궁에서 추방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세 자녀는 모두 아내가 없는 동안 태어났다.
프톨레마이오스 사이의 빈번했던 근친상간은 클레오파트라의 직계 조상들에게서도 나타나는데, 그 사례는 아래에 제시되어 있다.
아래에 제시된 가계도에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아내인 클레오파트라 5세가 프톨레마이오스 10세 알렉산더 1세와 베레니케 3세의 딸로 나와 있다.
이를 따르면 그녀는 남편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사촌이 되지만 클레오파트라 5세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 라튀로스의 딸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녀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여자형제이자 아내였을 것이다.
Cleopatra VII at BBC History
Cleopatra VII at World History Encyclopedia